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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③
[기획연재]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③
  • 교수신문
  • 승인 2002.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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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날의 산통’ 속에 才士들을 만나다
“고난의 역사다. 조선 역사의 밑에 숨어 있는 기조는 고난이다. 이 말을 듣는 사람은 놀라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섭섭한 사실이다. 나는 6·7년 이래 중학생에게 역사를 가르치는 기회를 가졌으므로 어떻게 하면 그 젊은 가슴 안에 광영있는 역사를 파악시킬가하고 노력하여 보았다. 그러나 무용이었다”라고 역사 교사된 것을 탄식할 수밖에 없었던 함석헌은 <대체 우리는 대민족이 아니다. 중국이나 로마나 페르샤나 터어키가 건설했던 것과 같은 대국가를 건설해본 적이 없다. 또 지금껏 역사극에서 주역을 演해 본 일도 없다. 애급이나 로마나 희랍이나 중국 등 모양으로 세계문화 위에서 뛰어나는 위대한 자랑거리도 없다. 피라밋트 같은, 만리장성 같은, 宏大한 유물이 있는 것도 없고 대발명가도 없다. 인물이 있기는 하나 그 사람으로 인하여 세계사에 일대변혁이 생겼다 할만한 이는 없고 사상이 없었던 것 아니나 세계사조의 一主流를 이룰만한 것은 없다. 그보다도 있는 것은 치욕이요 압박이요 분열이요 상실이요 타락의 역사다. 공정한 눈으로 볼 때 그렇다. 이는 실로 비애의 발견이었다. 세계의 모든 민족이 다 제각기 조물주의 앞에 가지고 갈 선물이 있는데 우리는 오직 고난을 당하는 것뿐인가 할 때 천지가 아득하였다. 애급 바빌론은 문명의 창시자의 영예를 가지었고 중국은 그 도덕을 희랍은 그 예술을 로마는 그 정치를 가지고 갈 터이지만 조선은 무엇을 가지고 갈 터인가. 인도는 망해도 불교를 남길 수 있고 猶太는 없어져도 기독교가 길을 수 있으며 영국은 오히려 憲政을 자랑할 수 있고 독일은 오히려 철학을 자랑할 수 있으나 조선은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자랑할 터인가>라고 이미 지금부터 반세기도 훨씬 넘은 일제시대인 1930년대 초에 이렇게 한탄하고 있는데 이와 같은 참담한 구렁에서 그를 구원해주는 손은 성서가 보여주는 진리였다.
“이 고난이야말로 조선이 쓰는 가시면류관이라고 했다. 그리고 세계의 역사는 요컨대 고난의 역사라고 깨달을 때 입때것 학대받는 婢女로만 알았던 것이 그녀야말로 가시면류관의 여주인공임을 알았다”라고 당시를 술회하고 있다.

“예언 없이 역사는 없다”
1950년 4월 1일에 출판된 ‘聖書的 立場에서 본 朝鮮歷史’의 말미에 ‘이제 우리는 본래 평화적인 민족인 것, 고난의 터전을 맡았던 것, 대국가를 못 이룬 것, 식민지 노릇을 해 본 것, 전패국에 속하면서 전승국이 된 것, 해방이 되면서 이중의 구속을 받게되는 것, 세계의 이대조류가 이 나라의 복판에서 대립하는 것을 다시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거듭 주의를 환기시키면서 미래의 함축이 없는 역사는 없으며 따라서 예언없이 역사는 없다고 잘라 말한다. 즉 역사는 예언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미 6·25 사변 일주일 전에 YMCA 강당에서 들었던 함선생님의 예언아닌 예언을 소개한 바 있지만 ‘聖書的 立場에서 본 朝鮮歷史’의 후신인 ‘뜻으로 본 한국역사’의 ‘6·25’라는 제목인 33장에서 6·25사변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이 늙은 갈보의 겨드랑에서, 이빨사이에서, 내장 갈피에서, 자궁 틈어리에서, 뼈 속에서, 세포 속에서, 박히고 끼우고 물들고 스며든 더러움, 늙음 짖어짐을 말갛게 뽑아내자는 것이 이 전쟁이었다…우리가 감히 예언하자는 것이 아니었지만 예언이 되지 않았나? 30년 전 이 역사를 쓸 때 남해 물밑을 지난 다음에 제주도가 있다 했는데, 정말 우리는 지금 있던 것을 다 내버리고 알몸으로 제주도에 올라왔다. 하필이면 왜 제주도 한라산은 1950미터로 되었나? 1950년이 전쟁으로 새시대 새 나라가 시작되는 것을 표한 것 아닌가? …우리가 무어라 하였던가? 새 전장판이 부른다고 하지 않았나? 과연 새 전쟁이 일어났다…우리가 무어라 하였던가? ‘우로 돌아 앞으로!’ 하면 우리가 앞장을 서게 된다고 하지 않았나? 정말 오늘 우리야말로 세게 역사 행진의 맨 앞에 섰다…이제 금수강산은 세계의 공동 묘지가 되었다. 중국이 먹었다 토하고 만주가 먹었다 토하고, 영악한 일본이 먹었다가도 아니 토하고는 못 견딘 나라, 흉악한 러시아가 침을 흘리면서도 못먹었던 나라, 이 나라에 중국이 도로 나오고 만주가 또 오고, 러시아가 다시 오고, 처음으로 문을 열어 주었던 미국이 또 왔다. 그뿐 아니다. 세계의 모든 나라가, 그 사람 중의 잘난 것들을 고르고 그 기계의 날카로운 것을 붓고 한데 엎어져 묻히였다. 이 나라는 인류의 제단, 유엔의 제단, 민족의 연합의 제단이 되었다…이 “한나라”는 “하나의 세계”의 제단이 되었다…이 늙은 갈보, 거렁뱅이 처녀, 수난의 여왕이 새 날의 임금을 낳으려고 하는 산통의 부르짖음이 6·25다. 4·19, 5·16이다. 그런데 낳을 힘이 없다. 아기를 낳게 되어 가지고도 낳을 힘이 없다는 계집아, 너와 아기가 다 죽을 것이다.><이러한 일을 들은 자가 누구며 이러한 일을 본 자가 누구뇨, 나라가 어찌 하루에 생기겠으며, 민족이 어찌 순식간에 나겠느냐 그러나 시온을 구로하는 즉시에 그 子民을 순산하였도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내가 임산케 하였은즉 해산케 아니하겠느냐 네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해산케 자인즉 어찌 태를 닫겠느냐 하시니라.>(이사야:66장 8,9절)

“함선생님 남하로 남쪽이 무거워져”
구약성경에 나타난 이사야 선지의 말로서 8·15 해방과 6·25 동란, 4·19 학생혁명 그리고 5·16 군사혁명을 다 함께 새 날의 임금을 낳으려는 산통의 부르짖음으로 해석하고 새날의 영광을 이 민족에게 임재하게 하시는 조물주의 섭리를 굳게 믿고 있었던 함석헌은 6·25가 터지자 우선 가족과 또한 동지들 도합 20여명을 거느리고 오산학교 동창이며 동경에 같이 유학갔었던 명재억씨가 기관정으로 근무하고 있었던 국립 성환종축장으로 일시 피난하였다.
그러다가 인민군이 평택까지 진군하자 다시 남하하여 대전 YMCA에 근무하던 분의 주선으로 일시 대구의 김모 장로님댁에 머물다가 경상남도 김해군 대저면 대지리의 금석호 장로님 댁으로 피난처를 옮기게 된다. 이때 동행했던 분들 중에는 후에 다시 언급하게 될 노평구 선생 최태사 선생 그리고 연세대의 고병려 교수가 포함되어 있다. 이 분들 중 고병려 교수님은 함선생님이 이북에서 남하하였다는 이야기를 듣고 남한이 북한보다 무게가 더 무거워졌다고 말씀하셨다는 말을 전해듣고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

‘좌경연루’로 억울한 옥살이 하기도
함선생님이 해방후 이북 고향인 평안북도의 교육부장직을 맡게 되면서 겪은 고초는 다음 기회로 미루고 어떻든 이북에서 38선을 넘어 남하하여 옛 무교회주의 동지였던 오류동의 송두용 선생댁을 찾은 날이 1947년 3월 17일이었다.
송두용 선생께서 주관하셨던 성서모임을 맡아서 말씀하시게 되면서 그 모임의 일원으로 알게 되었고 그 이후로 여러모로 함선생님 주변에서 선생님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던 분이 노연태 선장이었는데, 6·25 당시에 김해군 금장로님댁에서 2년 가까이 머물고 계실 때도 노연태 선장은 물심양면으로 함선생님을 도왔던 분으로서 나의 뇌리에 생생하게 남아 있다.
선생님이 평생에 단 한번의 공직생활이라고 할 수 있는 1928년부터 10년 가까이 근무하신 오산학교 역사교사직을 그만두신 다음 한두해를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오산학교 근처를 배회하다가 1940년에 평양시의 송산농사학원을 인계받아 운영하실 때 당시 13명의 학생중의 한사람이었던 최진삼 장로를 빼놓을 수가 없다.
송산농사학원에 입학할 당시 16세였던 까까머리 총각은 함선생님의 둘째 사위가 되어 함선생님을 돌아가실 때까지 무려 50여년을 선생님 곁에서 실질적으로 모시고 살아온 산 증인이다.
최진삼 장로는 덕천 공립중견농업학교 2년을 마친 다음 6촌 형님의 권고로 김두혁이라는 분이 창설, 운영하던 송산농사학원에 입학하게 되어 처음으로 함석헌 선생님을 뵙게 된다.
함선생님께 송산학원을 인계하고 동경으로 건너간 김두혁 선생이 일본사람들의 소위 좌익 모임인 鷄友會에 연관되어 체포되는 바람에 송산에 내려가신지 6개월만인 1940년 8월에 함선생님도 연루되어 평양 대동경찰서에 검거되어 미결수로 일년을 복역하게 된다. 선생님의 ‘한배움’이라는 글에 소개된 바에 의하면 선생님의 아버님께서는 선생님이 복역하는 중에 돌아가시고 김교신 및 송두용 선생이 서울서 내려와 상제노릇을 하였다고 한다.
내가 천안농업고등학교 부임한지 1년 후에 바로 이 김두혁 선생님이 천안농업고등학교 교장선생님으로 부임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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