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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직후 극한의 소외 느꼈다"
"은퇴 직후 극한의 소외 느꼈다"
  • 최성욱 기자
  • 승인 2012.05.29 14:37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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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교수들의 정년 이후를 위협하나

시간은 인지하는 순간부터 조금씩 느려진다. 기약 없는 삶에서 ‘시간싸움’은 훨씬 더 느리게 진행된다. 지난 2월 정년퇴임한 ㄱ교수(66세,여)는 이런 시간과의 만남을 ‘충격’이라고 표현했다. 석 달. ㄱ교수의 시간은 대학과 사회의 단절 속에서 흘렀다. 그는 “느리게 흐르는 정년퇴임 교수의 시간을 무엇으로 채워야 하느냐”며 오히려 되물었다.

비교적 오랜 정년 시기와 높은 연금 수혜를 이유로 교수들의 정년은 오롯이 개인의 몫이라는 인식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정년퇴임 교수의 시간도 느리게 흐르긴 마찬가지다. 퇴임교수들은 "노후자금과 거처를 마련하고 소일거리할 취미생활을 찾는 것이 정년 이후 교수의 전부냐"고 묻고 있다. 지난달 30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교수신문 창간 20주년 기념식'에도 원로교수들이 대거 참석했다.

ㄱ교수는 아침 6~7시에 일어나면 신문부터 펼쳐든다. 워낙 꼼꼼하게 읽는 편이기도 하지만 신문 한 부를 서너 시간이나 본다. 간단히 식사를 마치면 화초에 물을 주고 전공서적을 꺼내 읽는다. 재직할 땐 보지 못했던 TV연속극을 챙겨보는 취미도 생겼다. “은퇴 직후에 극한의 소외를 느꼈어요. 자격지심이랄까요? 퇴직한 학교를 드나들면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묘한 심리가 있죠.”

그는 장을 보거나 친구를 만나는 일 말고는 외출하기가 마뜩잖다고 했다. 영화를 보려고 시내를 나가도 학생들과 마주칠까 눈치가 보인다. 그래서 한 달에 한두 번 날아오는 학술대회 초대장이 반갑다. 이조차 요즘엔 후배교수들로부터 “늙은이가 기웃거린다”는 말을 듣진 않을까 내심 신경이 쓰인다.

지역국립대에서 여성과 노인의 일상성을 연구한 사회학자인 ㄱ교수는 자신에게 일상이 돼버린 ‘소외’ 앞에서 정년과 노후가 심하게 흔들리고 있음을 체감하고 있다.

사실 ㄱ교수가 지목한 ‘소외’는 학문공동체로부터의 단절이고 격리다. “은퇴자를 위한 연구공간이 절실해요. 물론 연구는 집에서도 할 수있죠. 그러나 지식인들이 서로 토론하고, 자극도 줘야 연구성과가 나오거든요.”

요즘 ㄱ교수는 농촌을 다니며 집을 알아보고 있다. 한국 농촌의 읍내를 활성화할 방안을 연구하기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느리게 흐르는 ‘자연의 시간’ 속에서 그들과 함께 어우러지고 싶어서다.

구청에 한자반 등록하고,  ‘교사 자격증’ 응시 하기도

사범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ㄴ교수(66세,남)는 ‘활동형’이다. 지난 2월에 정년퇴임하고 가장 먼저 동네 인근의 헬스장을 등록했다. 구청이나 동사무소 홈페이지를 뒤져 한자·한시반을 두 군데나 다니고 있다.

수강생이 대부분 주부나 노인들이라 기초반이지만 좋은 시구가 나오는 날에는 하루 종일 외우고 다닌다.
헬스장과 한자·한시 수강은 모두 심신의 건강을 챙기는 취미생활이자 일상을 보내기 위한 ‘스케줄’이다. “집밖에 나가서 ‘할 일’이 있어야 살아있는 걸 느끼잖아요. 그래야 몸과 마음의 건강도 유지할 수 있어요.”

오는 8월 정년퇴임 하는 ㄷ교수(65세, 남)는 시험공부에 열심이다. 지역 사립대에서 프랑스어를 전공한 ㄷ교수는 9월에 있을 ‘한국인교사 자격증’에 응시했다. 자격증을 따면 외국인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칠 수 있다. “일평생 프랑스어를 가르치다보니, 듣기·읽기·쓰기 등 한국어가 취약한 거에요. 작년부터 국어공부를 다시 시작했어요.”

ㄷ교수는 대학과 교회를 오가며 외국인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시험에 합격하면 자녀들이 사는 서울로 이사할 생각으로 서울지역의 대학원을 물색 중이다.

정년을 앞두고 국제학술지에 투고할 논문을 쓰고 있는 ㄷ교수는 이렇게 말한다. “여건이 된다면 정년을 하고도 우수한 국제논문을 쓰고 싶어요. 미국이나 프랑스 등 해외대학은 은퇴한 교수들도 저작활동이 왕성한 반면, 국내대학은 재정과 공간 확보의 어려움 탓인지 퇴임교수들이 연구를 이어가기 힘듭니다.”

정년퇴임 교수들의 소외감은 학문공동체로부터 이탈한 데서 비롯한다. ‘교육과 연구’ 활동이 끊어지면서 느끼는 심리적 공황은 정년퇴임 교수들이 한목소리로 지적하는 난제다. 그에 비하면 ㄹ교수(74세, 남)의 사례는 극히 이례적이다.

2003년, 서울지역의 한 공과대학에서 정년퇴임한 ㄹ교수는 지금도 연구실을 나간다. 정년을 하고도 연구실을 유지하는 교수는 학과에서 유일하다. 공식적으로는 학과 소속 연구소의 책임연구원이다.

ㄹ교수는 정년퇴임 이후 국제학술지에 투고한 논문만 60편이 넘는다.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50여 편을 합하면 100편이 훌쩍 넘는다. 매년 10편이 넘는 논문을 생산했고, 매달 1편 이상의 실험과 발표를 해온 셈이다.각종 강연과 자문활동까지 합하면 일흔이 넘은 지금까지 쉼 없이 달리고 있다.

ㄹ교수는 “많은 시간을 한 주제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에 현역 때보다 연구의 심도가 더 깊어지는 것 같다. 논문 편수와 깊이·양을 비교해도 (현역 때와) 별반 차이가 없다”라고 자평했다.

ㄹ교수는 본인 말마따나 ‘얼떨결에 학교에 남게 된 경우’다. 당시 ‘국가지정연구실’로 운영돼 정년퇴임을 기점으로 1년 6개월을 더 있어야 했던 것. 전공도 이론계통이라 여기저기서 자문을 많이 받았다. 여러 가지 일을 이어서 맡다보니 내년이면 정년퇴임한 지 10년이다.

ㄹ교수는 늘어나는 퇴임교수에게 연구나 자문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열어두자는 제안에 공감했다. “퇴임교수들은 유행이나 권위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어서 젊은 연구자들이 빠뜨리는 것을 보완할 수 있어요. 꼭 실험실에서 실험하지 않아도 새 이론으로 만들어 낼 연구주제는 많거든요.”

40대에 신임교수 되고, 연봉제 겹친다 …  “정년준비? 말이야 쉽지”

조남재 한양대 교수(경영학부)가 지난 2010년 초에 마무리한 ‘한국연구재단의 우수원로연구자지원 프로그램 개발에 관한 연구’를 위해 국내 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5천30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했다.

아직 정년을 맞지 않은 이들은 ‘정년후에 수행할 활동 계획이 있는가’라는 질문에 59.7%가 계획이 있다고 밝혔다. 전혀 계획이 없다는 응답은 2.8%에 불과했다. 정년 후 활동 계획에 대해서도 77.5%가 “정년 후에도 전공 분야와 관련한 학술활동을 계속할 의향을 가지고 있다”고 말했고, 56.6%는 “다른 전공분야에 대해 배우거나 학술활동을 계속 하고 싶다”고 했다. 36.0%는 “학술연구와 관계없는 사회 활동을 하고 싶다”는 의견도 밝혔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고령화 사회’에서 ‘고령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교수사회도 정년퇴임을 맞는 교수가 급격히 늘어난다. 퇴임교수는 해마다 늘어 2018년엔 2천575명에 달할 전망이다.

지난해 <교수신문> 신임교수 임용조사 결과도 주목할 만하다. 신임교수의 평균 나이가 40세를 넘었다. 신임교수 고령화 현상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정년’은 이제 일상적인 고민이 됐다. 그러나 성과연봉제 등 교수사회의 경쟁체제가 강화되면서 ‘정년 준비’는 말처럼 쉽지 않다.

최근 5명의 동료교수들과 함께『인문학자, 노년을 성찰하다』라는 책을 펴낸 송명희 부경대 인문사회과학연구소장(국어국문학과)은 “이제는 국가적 차원에서 체계적인 노년 대비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노인은 ‘무기력하고 쓸모없는 폐품’이 아니라 ‘성숙하고 지혜로운 인간’이라는 가치의식을 전제한 인간학적 성찰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노년을 준비한다고 하면, 노후자금을 마련하고, 소일할 취미생활을 찾고, 은퇴해 여생을 보낼 장소를 정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우리가 준비해야 할 노년의 전부인 것일까. 그것을 준비하는 것만으로 노년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것일까.”

<교수신문>은 노년의 준비와 정년 이 후의 삶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사회적으로 기여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인지를 실태조사와 함께 살펴볼 예정이다.

최성욱·김봉억 기자 cheetah@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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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이 2018-01-25 17:06:37
정말 간절히 기대하던 기사네요. 여기저기 은퇴후 창업 등 노인들에 대한 기사들이 많지만 교수들의 은퇴 후 삶에 대한 자료는 거의 찾기 힘들었답니다. 앞으로도 관련 기사가 많이 나왔으면 합니다.

이명하 2012-06-04 12:41:29
의미있는 기사 감사합니다.
바람직한 정년퇴임 후 교수님들의 자료가 더욱 많이 공유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