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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이읽기]『무한자와 우주와 세계』(조르다노 브루노 지음, 한길사 刊)
[깊이읽기]『무한자와 우주와 세계』(조르다노 브루노 지음, 한길사 刊)
  • 정병훈/경상대·철학
  • 승인 2000.12.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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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의 원인 개념 비판...무한우주의 절대 원리 '일자' 옹호
학문하는 일은 벽돌담장 쌓기에 비유해 볼 수 있다. 벽돌담장을 높이 잘 쌓으려면 우선 기초를 든든히 해야 하고, 어느 한 곳 빼 먹지 않고 차곡차곡 고루 쌓아야 한다. 또 쌓는 일을 잘 나누어 맡아서 한 쪽에 편중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 철학계의 연구 상황을 생각해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다. 중요 원전들의 상당수가 번역조차 되어있지 않은 형편인 반면, 일부 철학자에 대한 연구는 지나치게 중복되는 감이 없지 않기 때문이다. 강영계 교수가 번역한 조르다노 브루노의 '무한자와 우주와 세계', '원인과 원리와 일자'를 읽으며, 마치 숭숭 뚫려 있던 불안한 벽돌담장 중 어느 한 부분이 제대로 메꾸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우리 학문에서 가장 취약한 부분인 르네상스 사상을 대표하는 저작이기에 더욱 그랬을 것이다.

르네상스는 11세기에서 12세기에 걸쳐 아랍 세계로부터 역수입된 고대 희랍의 저작들이 라틴어로 번역되고 해석됨으로써 고대 희랍 사상이 부활되던 시기였다. 르네상스를 통해서 부활된 고대 희랍 사상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피타고라스-플라톤적 전통이다. 특히 플로티노스의 신플라톤주의는 근대 자연과학의 형성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코페르니쿠스를 비롯하여, 갈릴레오, 케플러, 그리고 뉴턴까지 신플라톤주의자였거나, 그것으로부터 심대한 영향을 받았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피타고라스-플라톤적 전통을 이어받은 신플라톤주의는 태양중심체계, 일자(一者)로부터의 유출로서의 우주 개념, 수학적 신비주의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고 있었다. 이에 영향을 받은 르네상스 철학은 세계의 무한성, 정신과 자연의 통일, 개체의 해방으로 집약될 수 있다. 브루노의 저작은 이 르네상스 사상의 핵심을 대변한다.

'무한자와 우주와 세계'(1584)는 다섯 명의 인물이 등장하여 대화하는 형식으로 씌어진 대화체 저작이다. 여기서 대화의 주제가 바로 무한한 전체와 무수한 천체이다. 브루노는 자신을 대변하는 인물을 내세워 아리스토텔레스와 프톨레마이오스의 자연학 및 천문학을 비판하면서 자신의 형이상학적 우주론을 펼친다. 그의 논변은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고 우주는 구체이며 시공간적으로 유한하다는 생각을 반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는 플로티노스의 유출설을 받아들여서 일자로부터의 유출에 의해 생명이 충만한 우주가 무한히 생성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우주에는 무수한 천체들이 존재하며 시공간적으로 무한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무한성은 브루노에 따르면 무한한 힘과 능력의 무한한 작용에서 비롯된 것이다. '무한자와 우주와 세계'가 브루노의 우주론을 담은 것이라면, '원인과 원리와 일자'는 브루노의 형이상학적 입장을 핵심 내용으로 하고 있다. 이 저작에서 브루노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원인 개념을 비판하면서 원인, 원리, 형상, 실체의 개념들을 새롭게 규정하고 있다. 무한한 우주와 무한한 전체의 절대적인 원인 혹은 원리로서의 일자 개념을 명료화하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브루노의 저작들은 근대철학에 있어서 자연의 개념, 원인 개념, 자연과 자아와의 관계, 무한한 우주를 관통하는 법칙을 통찰하는 이성의 개념 등이 확립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케플러와 갈릴레오, 스피노자와 라이프니츠 등이 그의 영향권 안에 있었다. 하지만 브루노의 사상은 당시의 카톨릭 교회의 교리와 이념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것이었다. 1600년 브루노는 이단 판결을 받고 로마에서 화형을 당하고 만다. 그리고 그의 저작들은 1603년 금서목록에 오르게 되었다.

이 책은 브루노가 카톨릭 교회에 의해 화형당한 철학자라고만 알고 있는 철학도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 및 근대 사상에 관심을 가진 인문학자나 과학사가들 모두가 반겨야 할 역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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