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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남산, 그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 안창모 경기대·건축사
  • 승인 2012.05.21 14: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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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건축으로 따라가본 남산 현장

서울시민이면, 아니 한국인이면 서울과 함께 떠올리는 장소가 있다. 남산! 한 때, 초중고생의 백일장과 사생대회의 단골장소였고, 연인들의 데이트코스였으며, 서울역에서 온천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 새신랑과 신부가 드라이브코스 1순위로 선택하던 곳. 남산은 애국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와 함께 하던 곳이었다.

 

1958년 경 남산. 한 부부가 결혼 사진을 찍고 있다.

 

남산이 역사에서 그 존재를 새삼스럽게 드러낸 것은 개항 이후다. 남산에는 서울을 도읍으로 정하는데 큰 공을 세운 조선의 국사, 무학대사의 초상이 모셔져 있었다. 우리에게 國師堂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목멱신사는 고종연간까지 매년 봄ㆍ가을 국가에서 치르는 醮祭를 극진히 받아왔다. 남산의 변화가 시작된 것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면서부터다. 1893년 도성 안에 외인의 거주가 허락된 후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자국민을 남산의 북사면에 정착시켰고, 일인 마을이 만들어졌다.

식민지배의 심장부가 된 북측 산록

이 때 일본은 임진왜란 때 자신들이 남산에 성을 쌓았다고 주장하며 남산일대를 왜성대라 부르고 연고권을 강조하기도 했다. 남산에 터를 잡은 일인들은 지금의 숭의여자대학 터에 경성신사를 세웠고 그 아래에는 을사늑약 체결과 함께 통감부가 세워졌다.

통감부 청사는 한국을 강제로 병합한 뒤에는 1926년까지 총독부로 사용됐으며, 그 후에는 일왕의 은혜를 어린이들에게 베푼다는 의미의 은사과학관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6·25전쟁을 겪으면서 화재로 없어지고 그 자리에는 지금 애니메이션 센터가 세워졌다. 그 밖에도 총독부 건너편에 일본인 사찰이 위치했으니, 명실상부하게 남산의 북측 산록은 식민지배의 심장부였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남산의 공간적, 정치적 위상에 변화가 생긴것은 1926년에 경복궁 내에 신청사를 지으면서부터다. 일제는 신청사로 옮기면서 동시에 남산의 성곽을 철거하고 능선을 깎아 조선신궁을 완성해냈고, 이로써 조선 내 최고의 신사가 경성신사에서 조선신사로 바뀌었다. 한편 현재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 위치했던 경성부청(현 서울시청)도 덕수궁 앞으로 옮겨졌다. 이로써 남산의 북측산록에 자리 잡았던 식민 지배 권력이 경복궁과 남산 그리고 덕수궁 앞으로 분산 배치됨으로써 서울의 도시공간 전체를 관통하는 식민지 지배체제가 완성됐다.

 

남산에 자리했던 통감부 건물

 

이후에도 남산의 훼손은 지속됐다. 장충단에는 일인을 위한 공원이 조성되고, 식민지배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사찰이 건축됐다. 사찰의 정문에는 경희궁의 정문이었던 흥화문이 사용됐다. 박문사 자리에 들어선 현재의 신라호텔에는 정문과 진입로 그리고 계단 등 박문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해방 후에도 수난은 끊이지 않았다. 해방 전 남산에 식민지배의 상처가 남아있다면, 해방 후에는 전쟁과 분단의 흔적이 곳곳에 새겨졌다. 해방 후 북에서 내려온 피난민들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남산의 남측 산록에 해방촌이라 불리는 슬럼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서울역을 마주하고 있는 남산의 서측 산록에는‘양동’이라 불리는 사창가가 형성되기도 했다.

사창가·터널·호텔… 정점에 달한 훼손

한 때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이 조선신궁 자리에 세워지기도 했지만 4·19혁명으로 사라졌고 신궁터 옆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의사 기념관이 세워졌다. 지금은 대우빌딩 건설과 재개발사업으로 힐튼호텔이 들어섬에 따라 옛 흔적이 사라지고 없지만, 그 과정에서 남묘가 위치를 잃어버리고 사당동으로 쫓겨났다.

한편 5·16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정부가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남산에 자유센터를 건설해 한국을 아시아 반공의 성지로 만들고자 했으며, 1968년의 무장공비에 의한 청와대 습격사건인 1ㆍ21사태가 발발하면서 유사시에 방공호로 사용하기위한 남산 1호 터널과 2호 터널이 건설되기도 했다. 이밖에도 외국인을 위한 임대아파트가 건설되고 하얏트호텔이 건설되면서 남산의 훼손은 정점에 달했다.

다행히 1990년대 이후 ‘남산 제 모습 찾기’운동이 벌어지면서, 남산에 건설됐던 외국인을 위한 아파트가 철거되고 신사의 흔적을 지우고 성곽이 복원되고 있다. 다행스럽게도 박정희정부의 권력기반이었던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도 민주화시대를 맞아 남산을 떠났다.

그러나 지난 100여년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한국근현대사의 현장을 지우고, 마치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되돌려 놓는 것만이 능사인지는 생각해 볼 일이다. ‘百聞이 不如一見’, ‘Out of sight, out of mind’라고 했다. 비록 잘못된 역사라도 그 흔적을 남겨, 어떠한 교훈으로 삼을 것인지는 당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몫이다.

안창모 경기대·건축사

안창모 경기대·건축사필자는 서울대에서 박사를 했다. 현재 서울시와 경기도의 문화재위원이다. 『 한국 현대 건축 50년』,『 덕수궁_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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