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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포트킨에 대한 회상
크로포트킨에 대한 회상
  • 이영석 서평위원/광주대·서양사
  • 승인 2012.05.21 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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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우리는 생각한다

젊은 시절에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 진화론」을 읽고 큰 감명을 받은 적이 있다. 그 기억이 오랫동안 남아 있었기 때문인지, 몇 해 전에 나는 크로포트킨이 영국 망명 시절에 쓴 일련의 과학 평론을 읽고 분석하는 작업에 매달렸다. 19세기 말 그가 여러잡지에 기고한 글들을 찾아 읽으면서, 나는 다시 한번 크로포트킨의 정신세계와 그 치열한 삶에 매료됐다. 사실 크로포트킨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다. 러시아 귀족 출신으로 반체제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시베리아 유형, 수감, 탈옥, 망명 등을 거듭한 그의 삶은 그가 살아 있던 당대에 이미 전설이 됐다. 무정부주의운동에 가담한 혐의로 프랑스에서 다시 투옥되는 고초를 겪은 후 그는 1880년대 후반부터 오랫동안 영국에 체류했다. 사실 영국 지식인사회에서 무정부주의자들은 혐오의 대상이었지만, 크로포트킨만은 예외였다. 그에 대해서는 이념과 정파에 관계없이 많은 영국 지식인들이 호의적으로 대접하고 높이 평가했다. 일부 보수적인 인사를 제외하면 자유주의자에서 페이비언주의자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크로포트킨을 존경했다.

크로포트킨이 영국에서 이같이 환대를 받은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유형, 투옥, 탈출로 이어지는 그의 극적인 생애와 지리학자로서의 명성 외에 무엇보다도 그가 러시아 명문귀족 출신이라는 점이 긍정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크로포트킨은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 여러 지식인과 교류 했으며, 이들의 도움으로 몇몇 신문과 잡지에 논설을 기고하는 등 문필가로 두각을 나타냈다. 그의 중요한 논설은 거의 대부분 <19세기>라는 잡지에 실렸다. 그의 논설들 가운데 특히 상호부조의 개념을 역사적으로 성찰한 일곱 편의 글도 모두 이 잡지에 발표했다. 이는 올더스 헉슬리의 사회진화론을 비판함과 동시에 이를 넘어선 원리를 세워보라는 지리학자 헨리 베이츠의 권유를 받아들여 이뤄진 것이다.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 개념은 과학 기술의 발전을 신뢰하는 이 같은 낙관론과, 그리고 인간에 대한 믿음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크로포트킨은 진화론의 옹호자였으며 생존경쟁이나 자연선택 같은 개념도 무조건 배척하지 않았다. 그는 「상호부조 진화론」 再版 서문에서 種과 種 사이의 경쟁인 외부전쟁과 종 내부 개체들 사이의 경쟁인 내부전쟁의 역동적 역할을 인정하고 있다. 다만 그의 상호부조에 관한 논설은 다윈의 진화론에서 일종의 유행어가 된 생존경쟁과 적자생존 이라는 용어가 당시 인간사회의 모든 적폐를 합리화하는 이론으로 사용되고 있는 현실을 비판한데서 비롯한 것이다. 그가 상호부조론을 집필한 것은 바로 극단적 진화론과 그 전도사라고 여겨졌던 헉슬리를 비판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상호부조 진화론」에서 자연계에 관한 언급은 동물의 세계에 한정돼 있다. 곤충과 조류와 육식동물에 이르기까지 그가 제시하는 사례들은 주로 군대시절 시베리아지역 답사에서 쌓은 경험에서 얻은 것이었다. 예를 들어 그는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자연환경에서 살아가는 조류와 포유류들이 상호협동의 행태를 통해 자연의 폭압을 견뎌내고 있다는 것을 목격하고 놀라워했다. 우수리 강과 흑룡강변의 광활한 호수에서 함께 살아가는 갖가지 조류의 모습에서 종의 경계를 넘어선 상호부조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장엄한 광경에서 그는 상호협동의 실체를 절감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잘 알려져 있듯이,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은 자연현상의 관찰로부터 시작해 인간 사회의 역사를 성찰하는 것으로 끝난다.

그는 자연에 관한 과학지식에서 상호부조의 개념을 이끌어내 인간사회에 적용시켰는데, 이는 사회도 자연의 일부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이 혼탁한 현대사회에서 인류의 미래를 밝게 내다보는 그의 낙관론과 인간에 대한 신뢰는 시대 흐름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여겨질지도 모르겠다. 신자유주의가 기승을 부리고 전 세계의 모든 사람들이 경쟁의 대열에 줄을 서는 오늘날, 그의 상호부조 개념은 현실에 전혀 맞지 않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바로 오늘의 현실이 그렇기 때문에 크로포트킨의 상호부조론은 더 절실하게 필요한 개념이 아닐까 되물어본다. 도대체 우리 인류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신자유주의와 무한 경쟁 속에서 극소수를 제외한 다수가 낙오하고 희망을 잃어가는 오늘날, 우리는 어떤 대응도 포기하고 주어진 운명에 우리의 미래를 그냥 맡기기만 할 것인가. 그렇지 않다. 이 같은 패배주의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고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나서야 한다. 한 세기 전의 크로포트킨이 지금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바로 이런 결단이다.

이영석 서평위원/광주대·서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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