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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 텍스트 註解 그리고 경계를 넘나드는 콜로키움
문명 텍스트 註解 그리고 경계를 넘나드는 콜로키움
  • 이경하 서울대 HK연구교수·한국고전문학
  • 승인 2012.05.21 11: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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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신문-한국연구재단 공동기획_ 인문학, 새로운 도전을 찾아서 ③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이경하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연구교수·한국고전문학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문명연구사업단이 주력하는 대표적인 사업을 하나 꼽는다면‘문명텍스트 시리즈’라고 말할 수 있다. 문명텍스트 시리즈는 우리 사업단의 연구자들이 자신의 전공분야에서 고대로부터 근·현대에 이르는 각 문명의 중요한 텍스트를 선정해 번역·주해한 결과물이다.

우리 사업단 소속의 모든 연구자들은 각 단계마다 1종의 문명텍스트를 선정해 번역·주해하는 의무를 갖는다. 정기적으로 열리는‘문명의 텍스트 콜로키움’에서 그간의 작업 경과를 보고하고 연구 내용을 발표하며, 원고가 어느 정도 완성되면 해당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자문과 비평을 의뢰해 수정·보완 과정을 거친다. 또한 번역·주해서의 질적 제고를 위해 제출된 원고는 외부에 심사를 의뢰해 출판 여부를 결정한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 지난해 6월 도서출판 한길사에서 제1단계 문명텍스트 시리즈 7권이 첫 출간됐다. 지난 4월까지 총 10권이 출간된 상태고, 나머지 12권이 연말까지 완간될 예정이다. 그렇게 10년 사업기간 동안 60여 권의 문명텍스트 시리즈를 출판하는 것이 목표다.

번역·주해는 인문학 수준 가늠하는 척도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묻는다. 본격적인‘연구’를 해야지 왜 번역에 힘을 쏟느냐고. 번역이나 주해는 인문학의 방법 면에서도 구식이라고. ‘인문학의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인문한국(HK)사업은 뭔가 획기적인 연구 주제와 방법을 선보여야 하는 것 아니냐고. 일면 수긍하지만, 일면 동의할 수 없다.

번역과 주해는 인류 문명사에서 인문학이 시작된 이래 지속돼 온 대표적인 학술적 글쓰기 방법이다. 번역의 정확성과 주해의 깊이는 당대 인문학의 수준을 대변하는 척도가 된다. 제대로 된 번역·주해는 언어의 전환이나 축자적 해석에 그치지 않고, 텍스트 안팎의 맥락까지 다각도에서 정확하게 짚어내는 학문적 역량의 발현이다. 역자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래서‘잘 해야 본전’인 까다로운 작업이다. 번역·주해서 한 권이 논문 한 편과 동일하게 혹은 그보다 못하게 취급되는 것이 학계의 현실인데, 경쟁적인 업적 산출의 압박에도 불구하고 진지하게 번역이나 주해에 매달릴 연구자가 얼마나 될까.

그러한 문제의식 아래 우리는 문명 연구의 방법으로 텍스트의 번역·주해라는 고전적인 방식을 선택했다. 문명텍스트 시리즈는 인류 문명의 뿌리와 정수를 담고 있는 텍스트를 현대 우리말로 쉽게 옮기면서도 학술적으로 엄정하게 풀이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번역·주해가 외관상‘구식’일지라도, 한국 인문학을 튼실하게 하는 토대라고 믿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총 10권의 문명텍스트 시리즈가 출간됐고, 나머지 12권이 연말까지 완간될 예정이다.
제1단계 시리즈에는 한자 문명권의『맹자사설』, 『가게로 일기』, 라틴어 문명권의『자유의 법강령』,『 인류의 교육을 위한 새로운 역사철학』등 문명의 이해에 필수적이면서도 기존에 번역된 적이 없는 텍스트가 다수 포함돼 있다. 특히 몽골의『장가르』와 인도의『빠니니 읽기』, 5월에 출간될 아랍의『무알라카트』는 비주류 학문의 속성상 접하기 어려웠던 텍스트다. 또한『인류사의 사건들』,『 페미니즘과 지리학』등 근·현대의 문제의식을 담은 학계의 고전들도 포함돼 있으며, 기번역이 있는 경우에도 보다 정확한 번역과 심도 깊은 주해를 통해 텍스트의 문명사적 의의를 밝히고 있다.

문명텍스트 시리즈를 우리 사업단의 주력 사업으로 소개하면서 콜로키움의 중요성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현재 110회까지 이어진‘문명의 텍스트 콜로키움’이 중요한 것은 단지 연구자가 자신의 연구 성과를 발표하고 점검 받는다는 데만 있지 않다. 전공이 전혀 다른 연구자 20여 명이 한 자리에 모여 발표하고 토론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분과 학문의 경계를 넘고 타학문과 소통하는 길을 직접 체험한다는 데 있다.

다양한 전공자가 모여 발표하고 토론한 결과

우리 사업단의 특징 중 하나는 전임 연구인력의 전공이 너무나 다양하다는 점이다. 문·사·철 인문학뿐만 아니라 인류학, 지리학, 건축학 등 다양한 학문 분야의 전공자들이 한 공간에 모여 발표하고 토론한다. 그만큼 이편의 상식이 저편에서는 전혀 통하지 않는 당황스러움과 놀라움을 자주 경험한다. 그리고 내 학문의 기본 전제들을 다시 돌아보게 된다. 번역·주해의 구체적인 방식에 관해서도 직역과 의역, 충실성과 가독성 등 오랜 쟁점을 둘러싸고 더 나은 방식을 함께 모색한다. 그런 소통의 경험이 어쩌다 한두 번이 아니라 현재까지 110회, 앞으로도 매학기 매주 계속될 것이다. 문명텍스트 시리즈는 개인연구에 그치지 않고 분과 학문의 경계를 허무는 소통의 결과이기도 한 것이다.


이경하 서울대 HK연구교수·한국고전문학
서울대에서「여성문학사 서술의 문제점과 해결방향」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에서 여성의 언어문자생활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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