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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적인 것'과 그것이 남긴 흔적들
'한국적인 것'과 그것이 남긴 흔적들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2.05.16 10: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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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논문_ 「‘한국적인 것’의 전유를 둘러싼 경쟁」

 

참 도발적이다. “최근 다시 등장하는 국가정체성, 민족적 자긍심, 민족적 우수성, 전통 등을 강조하는 새로운 버전의 ‘한국적인 것의 창안’ 그리고 이를 둘러싼 담론과 정책은 현재 ‘또 다른 내적 위기’를 드러내는 징후”라는 주장 말이다. 주인공은 김원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사회과학부)다. 그는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한류, 케이팝을 넘어서는 한국문화 전반에 대한 지원 확대와 전통문화의 결합 등 최근 ‘한국적인 것’에 대한 강조는 전혀 새로운 현상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는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반에 등장했던 문화정책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 역사적 기원을 추적했다.

그는 이런 내용을 최근 <사회와 역사> 93집에 「‘한국적인 것’의 전유를 둘러싼 경쟁」이란 논문으로 발표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한국사를 부정적으로 인식했던 박정희는 정권의 정통성 강화를 위한 도구로 ‘한국적인 것’을 창안했다.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식민지 시기 이후 결여된 민족정체성을 정상화하기 위해 지배세력과 비판세력 모두 ‘한국적인 것’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이다. 그는 이 시기를 민족주체를 둘러싼 쟁투가 본격화된 시점으로 본다. 그는 우선 박정희 정권 주도하의 ‘한국적인 것’의 창안을 3가지 형태로 구분했다. 문화재, 조형물, 한국적 영웅 세우기가 첫 번째 단추였다.

민족이란 원초적 정서를 불러일으키기 위해 민족문화의 정수인 문화재 발굴, 정화, 성역화 작업이 이어졌다. 정신문화 강조, 호국정신 양양을 위해 임진왜란 부각하기 등이 단적인 예다. 이 대목에서 김 교수는 “정신문화에 대한 강조는 민족중흥의 주체로 생산-효율적이며 순종적이고 윤리적 주체를 강조하기 위한 것”(황병주 국사편찬위원회 위원), “임진왜란의 강조는 가히 ‘재창조된 임진왜란’으로 불릴 정도이며, 민족사 재발굴 차원을 넘어 ‘의병=향토예비군’식의 현재적 필요에 따라 역사를 불러온 것”(은정태 홍익대 강사)이라는 기존 시각을 빌려왔다. 두 번째로 박정희 정권은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을 설립해 문예정책을 통제했다. 민족중흥을 위해서는 과거 역사에 대한 긍정적인 해석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마지막 정책은 영화와 TV를 비롯한 대중문화 폄하 및 통제였다. 경제발전, 민족중흥 의지 표현, 호국선현 업적을 기리는 영화들이 제작됐지만 관객의 외면을 받았고 정부는 국책영화를 포기하는 대신 검열을 강화했다. TV의 상황도 다르지 않았다. 지식인 집단의 반응은 어땠을까. 김 교수는 문학계와 역사학계에서 정부주도 정책과는 별개의 흐름이 있었음을 밝힌다. <창작과비평>은 초기 문학전통 부재론에서 점차적으로 실학관련 연구를 확대했다. 실학은 근대적 정신의 내재적인 胚胎라는 역할을 담당했고, 낙후된 민족사라는 이전의 관념을 역전시킬 수 있는 매개였기 때문이다. 역사학계는 한국사연구회의 주도로 식민사관을 벗어난 실증적 연구를 통해 내재적 발전론을 확장했다. 한국사가 세계사의 보편성 속에 위치함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이런 양상에서 ‘한국적인 것’을 두고 지배세력과 비판적 지식인들 사이의 쟁투가 있었다고 김 교수는 지적하지만, ‘쟁투가 있었다’라는 서술은 서술 이상의 설득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것으로 읽힌다.

물론 김 교수 자신도 1970~80년대 한국적인 것을 둘러싼 쟁투가 정권의 억압과 이에 대항하는 비판적 지식인의 저항으로 단순화하기 힘든 복잡한 균열을 내장한다고 지적한다. 1970년대 정부와 비판적 지식인 사회가 한국적인 것을 지향했지만 그 내용과 방식에서 대립했다는 이야기다. 김 교수가 지적하는 ‘쟁투’의 두 번째 부분인 정부와 대중의 문제는 조금 더 긴장감 있게 읽힌다. 1960년대 경제성장과 근대화에 따라 급속하게 확산된 서구대중문화로 파생된 청년문화, 호스티스 멜로 영화, TV 드라마가 정부의 정책과 ‘경쟁’을 펼친다는 주장 때문이다. 검열, 단속과 같은 정부의 정책적 억압으로 이러한 대중문화가 탄생했다는 주장은 일면 공감할 수 있는 대목이다. 김 교수가 인용한 이상록 국사편찬위원회 전임연구원의 “서구문화의 확산은 서구를 모델로 한 근대화의 자연스러운 결과이며 대중문화는 대중들이 원해서 확대된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이런 문화를 검열, 단속으로 통제할수록 잠재적인 대중들의 무의식적 욕구는 강해질 가능성이 높았다”라는 논거도 그의 주장을 어느 정도 뒷받침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진단은 좀더 논리화 과정이 필요하다. 이 점에서 오히려 역동적으로 읽히는 곳은 다음과 같은 부분이다. 1970년대 ‘한국적인 것’의 창안을 통해 국가, 민족에 대한 감정적 애착과 정치적 소속감을 형성해 위기를 극복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의도는 절반의 성공을 거뒀다. 그렇지만 나머지 절반은? “청년문화 그리고 대중문화를 소비했더 대학생, 여공, 도시하층민은 표준화된 양식에 의도하지 않게 도전한, 다른식으로 표현하자면 한국적인 새로운 인간형이란 이름으로 엄숙주의, 검열, 민족문화의 부흥, 퇴폐외래문화 추방 등 형태로 강요된 가치, 규범, 도덕률로부터 해방되고 싶었던 무의식적 욕망을 대중문화를 통해 표출했다.”(송은영) ‘무의식적 욕망’의 주체인 대중들은 자신의 욕망을 순치하려는 박정희 정권의 ‘의도와 다르게’ 민족문화의 의미망에서 벗어난 문화의 흐름을 형성했다는 것, 그리고 이러한 ‘엇갈림’이야말로 한 시대의 내적 위기 징후이며, 지금 그 내적 위기가 외화되고 있다는 게 그의 결론이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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