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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화제] 美 ‘크로니클’誌, 철학자들의 삶에 물음표를 던지다
[해외화제] 美 ‘크로니클’誌, 철학자들의 삶에 물음표를 던지다
  • 이옥진 객원기자
  • 승인 2002.07.1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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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16 12:39:01
서구 철학자들의 전기출간이 황금기를 맞고 있다. 지난 1982년 이후, 서른 권의 철학자 전기가 발간됐다. 이 가운데 스무 권은 지난 10여 년 사이에, 10권 정도는 불과 지난 3년 사이에 쏟아져 나왔다. 지난 6월 7일, 미 고등교육 주간지 ‘크로니클 오브 하이어 에듀케이션(이하 ‘크로니클’)’은 이런 출판경향을 소개하고 있다. 칼럼니스트 대니 포스텔은 ‘삶과 정신’이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이 현상을 소개한다. 철학자의 삶 속에서 그의 정신을 읽어내는 ‘암호문의 코드’를 발견할 수 있는지에 대한 탐색이다.

한 사상가의 삶이 ‘정치적으로 올바르지’ 못하다면 사상은 어떻게 해독해야 하는가. 더구나 도덕적 책을 쓴 인물이 비도덕적 삶을 살았다면 그 저서를 해석하는 근거는 무엇인가. 여기서부터 다른 판단과 선택이 개입한다. 지난 1987년 발간된 빅토르 파리아스의 ‘하이데거와 나치즘’은 격한 논쟁을 불러일으켰던 저서다. 문제는 다시, 앎과 삶의 개연성이다. 당시 하이데거를 변호하려 애썼던 철학자들은 자기파괴적 결말을 피할 수 없었다. 하이데거의 삶에서 나온 앎은, 그의 삶과는 무관하게 평가돼야 한다는 결론. 다시 말하면, 하이데거의 나치 참여라는 전기적 사실은 그의 철학을 이해하는 데 별무소용이라는 것이다.

철학과 삶의 이음새를 찾아라

최근의 학문 경향은 이와 다르다고 대니 포스텔은 말한다. 철학자의 삶을 탐구하지 않는다면, 그들에 대한 철학적 이해는 엄밀하게 말해불충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 전기출판의 황금기는 오히려 철학자의 삶과 앎의 이음매를 이어주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 독자확보가 비교적 안정적이기 때문에 출판계가 철학자들의 전기물 발간에 열을 올리고 있다고 보는 이들도 있지만, 철학과 지식인의 삶에 대한 개념적 전환이 직접적인 이유라는 분석 역시 적지 않다.

물론, 지금까지 철학자에 대한 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최초의 전기는 디오게네스의 ‘철학자들의 삶’으로 무려 1천7백 여 년 전에 쓰여졌다. 20세기에는 칼 야스퍼스의 네 권짜리 ‘위대한 철학자들’이 있었고, 1980년대 이전에도 소크라테스, 어거스틴, 데카르트, 흄, 볼테르, 칸트 등의 삶을 다룬 책들은 많았다. 문제는 정작 철학자들이 전기에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푸코의 전기를 쓴 제임스 밀러 뉴스쿨대(인문학) 교수는, 철학자의 전기를 부정적으로 이해했던 과거의 태도를 이렇게 설명한다. “고전적으로 철학은 삶과 내적으로 긴밀한 일종의 ‘부름’이라 생각됐지만, 근대만 해도 오히려 삶과 사고를 분리시키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새로운 조류를 일으킨 것은 레이 몽크의 저서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 : 천재의 의무’(문화과학사 刊, 2000)라고, 테렌스 무어 캠브리지대 출판부 편집장은 평가한다. 무어에 따르면 이 책은 “동료 철학자가 존경을 담아 저술한 최초의 철학자 전기”이다. 저자 레이 몽크는 영국 사우스햄튼대에서 철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비트겐슈타인에 관한 박사논문을 쓰기도 했다. 평론가들 역시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전설적인 인물을 놀랄만큼 제대로 서술한 책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동료 철학자들이 쓴 철학자의 전기가 성공하면서 철학서적 출판계의 전기 평가도 달라지고 있다. 몽크의 책 출간에 고무되어 캠브리지대 출판부는 스티븐 내들러의 ‘스피노자’(1999)를 발간했고 내년에는 존 스튜어트 밀의 전기를 준비하고 있으며, 뒤이어 데카르트, 흄, 로크, 몽테뉴의 전기를 차례차례 발간할 예정이라 한다. 테렌스 무어는 철학자의 전기를 출판하는 것이 “비철학 도서시장을 개척”하게 해주고, “학술적으로 훈련받지 못한 일반 독자들에게 철학자의 삶 뿐만 아니라 그들의 사상까지 접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고 호평한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과 생애 사이의 개연성을 찾는 것은, 일견 비트겐슈타인의 철학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처럼 보인다. 분석철학 전공자인 마이클 크로즈 브린 모어 칼리지 교수는 “사람을 그가 속해있는 ‘풍경’으로부터 분리하라고 종용하는 것”이 분석철학이라면서, “이런 접근이 최근, 자아의 근원이나 의식의 사회적 형성 같은 역사주의적 개념에 자리를 내주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책을 이해하기 위해 저자의 생애를 들여다보는 발빠른 접근방법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서사적 전회’라는 이름을 얻으면서 철학자들의 전기는 보다 넓은 함의를 갖는다. ‘철학적 프로필’(펜실베니아대 출판부 刊, 1981)의 저자 리처드 번스타인은, 철학적 사고에서 ‘이야기하기’의 중요성이 높아지고 있다며, 이를 ‘서사적 전회’라 명명할 만하다고 말한다. ‘조지 허버트 미드 : 사회 실용주의자 만들기’의 저자, 개리 쿡 벨루와 컬리지 교수(철학)의 지적도 참고할 만하다. 역사주의적 성향이 문학이론이나 문화연구 등의 인문학 전반에 두드러지고 있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의 진단 역시 동류에 놓일 수 있다. ‘한나 아렌트 : 세상을 사랑한’의 저자인 정신분석학자 엘리자베스 영-브뤼엘은, 끝간데 없이 폭넓은 문화 속에서 철학자들은 당혹스러울 정도로 세계와의 관련성을 잃어가고 있다고 본다. “철학자의 감정과 체험을 사상과 떼어놓는 분열증적 상태에서 전기는 개연성있고 의미있는 삶을 회복시켜준다”고 진단한다.

많은 철학자들 역시 체험과 사상의 ‘뫼비우스띠’에 동의하고 있다. 콰인이 ‘이런 방식’으로 철학에 접근하고, 푸코가 ‘저런 방식’으로 다가가는 것에는 분명 이유가 있고, 그 이유는 전기에서 드러날 수 있다는 것이다. 비평가 칼린 로마노 전 템플대 교수(철학)는 전기와 철학에 대한 질문들을 집중적으로 다뤘던 ‘철학의 철학’ 강의에서 내려진 결론을 소개한다. “소설가와 같이 철학자도 주제나 방법, 스타일에 대해서 비판적 선택을 해야 한다”면서 “그런 선택을 한 철학자는 스스로의 삶이라는 짐을 학문여정에 동반시킬 수밖에 없다”고 첨언한다.

 

대니 포스텔은 전기 발간 ‘붐’의 내실을 소개하는 동시에, ‘거품’을 걷어내려는 노력에도 지면을 할애한다. 철학자들의 삶과 사상 사이에서 ‘명백한 관련성’을 수다스레 이끌어내는 전기를 소개하고 있다. 이들 전기에서는 철학자의 생애가 정신을 낳는 조건에 그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의 생애는 정신을 구속하는 한계인 것처럼 서술된다. 견강부회의 혐의를 피하기 힘든 대목이다.

하이데거 전기를 쓴 휴고 오트 프라이부르크대 교수(역사학)는, 하이데거가 독일의 슈바르츠발트 지방에서 자라면서 편협한 지역주의, 외국인 혐오증, 반모더니즘의 배경을 갖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하버마스의 전기 저자 마틴 벡 매투스틱 퍼듀대 교수(철학)는, 하버마스의 작업이 독일에서 자란 영향을 깊이 받았으며, 나치즘의 홀로코스트에 대한 죄책감의 세련된 표현이라고 단정짓는다.

요아킴 쾰러는 니체 전기에서, 니체가 억압된 동성애자였고, 기독교와 인습적 도덕성에 대한 깊은 반감이 그의 철학에 원동력이 되었다고 결론짓는다. 제임스 밀러가 쓴 ‘미셸 푸코의 열정’은 푸코의 사상과 섹슈얼리티 사이에서 내적 연결고리를 맺으며 이렇게 말한다. “푸코의 사도마조키스틱 호모에로티시즘적 성향이 지배나 처벌, 감시에 대한 지적 편견을 만들었으며, 성적·사회적으로 아웃사이더라는 자기이미지 역시 그의 철학에 한 몫 했다.” 그런가 하면 ‘형이상학 클럽’의 저자 루이스 메넌드는, 미국 실용주의 철학이 남북전쟁의 충격에 대해 집단적으로 대응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한다.

철학자의 전기를 읽으며 독자들은 우선 철학자 개인의 매력에 빠져들게 마련이다. 버트란드 러셀의 전기를 보자. 20대 후반의 버트란드 러셀은 그의 동료 화이트헤드의 아내가 우울증에 고통스러워하며 주위 사람들과 그리고 세상과 단절해버리는 것을 목도한다. 문득 모든 인간의 영혼은 고독할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고, 잠시 후에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외로움’이라는 명제를 믿게 되며, 이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고결한 것에 대한 사랑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는 일화는 그 자체로 놀랍다. 독자는 러셀에 대해 ‘참을 수 없는 관심’을 갖게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다른 한편, 전기 읽기는 철학자에 대한 사적 관심으로 그칠 수 있다. 레이 몽크가 쓴 버트란드 러셀 전기에 대한 평에서, 토마스 네이걸 뉴욕대 교수(철학)는 철학자의 고통스런 삶에 대한 정밀묘사에 불편해한다. 저서란 언제나 저자의 인생보다는 훌륭한 법. 그러므로 철학자의 책은 “정처 없고 어지러운 그들의 자아로부터도, 그 책을 생산한 불완전한 삶으로부터도 분리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네이걸 교수는, “전기물의 관심이 개인에게 향하며 철학으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 앞에서 안타까워한다.

앎과 실천의 모순, ‘출구없음’

앎과 실천의 모순, 철학으로 돌아오지 않기만 한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어떤 철학자들은 전기 속에 드러난 비도덕성이 그의 사상을 폄훼시킬 위험에 대해 불안해한다. 리처드 로티 스탠포드대 교수의 경우, 유독 전기의 문제에 대해서만 과묵함을 유지하고 있다고 대니 포스텔은 지적한다. 분석철학의 신화를 끊임없이 폭로해왔던 그의 지적 편력에 비춰보면 모순적이라는 것이다. 대니 포스텔에 따르면 로티 교수는, 하이데거의 나치즘과 그의 철학을 관련시키려는 움직임과, 가다머가 나치에 정치적으로 동정적이었던 사실이 그의 사상과 무관하지 않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부정적인 논증을 펴고 있다.

칸트는 아프리카인이 유럽인에 비해 열등하다고 여겼고, 헤겔의 경우 중국의 문자는 위대한 사상을 낳을 수 없다는 ‘개인적’ 신념을 지녔으며, 하이데거는 나치즘의 돌이킬 수 없는 과오에 일조하는 삶을 살았다. 이러한 전기적 사실들이 그들의 철학을 얼마나 설명해줄까. 철학의 전기적 독해를 긍정한다면, 이런 이력들은 철학자들의 업적을 논리적으로 함몰시켜버릴지도 모른다.

 

대니 포스텔은 글의 말미에서 철학자의 삶과 앎을 분리하지 않으면서도, 이 모순적 상황을 훌륭하게 벗어나는 법을 제시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기에서 얻은 통찰이 철학사상을 부정하게 하거나 폄하시킬 수는 없다는 결론으로 가는 비상구. 키에르케고르의 금언이 비상구의 문을 열어준다. “역설이 없는 철학자는 열정 없는 연인과도 같다.”

이 금언이 짧은 글의 결론으로는 합당할지 모른다. 그러나 글 밖으로 벗어나는 순간 ‘출구 없음’이라는 팻말 앞에 다시 서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변함없어 보인다.

이옥진 객원기자 zo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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