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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이념 빚어낸 역량, 어디서 왔을까
제국의 이념 빚어낸 역량, 어디서 왔을까
  • 김월회 서울대·중어중문학과
  • 승인 2012.05.09 16:3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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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인문교육과 고전읽기 ⑤ 역사의 ‘보이지 않는 손’ 고전(동양편)

현대 중국이 깔고 앉아 있는 강역은 지금 유럽의 1.8배에 달한다. 그럼에도 “유럽인은 지리학적 사실성에 반해 자신들의 반도를 한사코 ‘대륙’으로 격상시키고 있다. 그에 반해 인도는 겨우 ‘亞大陸’이고, 중국은 그저 ‘나라(國)’라고 한다.”

우리도 크게 다르지 않다. 유럽여행을 갔다 왔다고 하면 몇 개국을 둘러보았냐는 물음이 자연스레 나오지만, 중국여행을 갔다 왔다고 하면 결코 이 질문이 나오지 않는다. 여행한 거리가 유럽의 몇 개국을 돌아다닌 것보다 훨씬 길고, 마주했던 인문적, 지리적 풍경의 차이가 유럽의 이 끝과 저 끝의 차이보다 더 큼에도 우린 중국을 그저 한 개의 나라로 생각하고 만다. 하긴 UN에서 중국도 한 표, 한국도 한 표이니 그렇게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국제사회에서 한국이 중국과 동급이라고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적으로도 그러했다. 역대로 ‘大一統’된 중국이 단지 일개 국가에 머문 적은 없었다. 상대적 약자일수록 사실을 기반으로 상대를 정확하게 인식해야 함은 자명한 일일 터, 이른바 ‘우리’가 나라였다면 중국은 ‘천하(world)’였다. 이는 ‘우리’에 대한 과소평가도 또 중국에 대한 과대평가도 아니다. 중국인의 지나친 자존감이 초래한 과대망상은 더욱 더 아니다. 실제로 그들의 나라는 ‘제국’이었고, 그들의 수장은 천자 곧 황제였다. 그것도 어느 한 왕조 때 잠깐 그랬다가 만 것이 아니라, 진시황이 중원을 ‘대일통’한 후 줄잡아 2천200여 년 간 대체로 그러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러한 일이 가능했을까.

진시황,  ‘지식의 통일’을 제국 유지 관건으로 이해

진시황은 제국 유지의 관건은 지식의 통일에 있다고 봤다. 한자의 글꼴을 단일화했고 도량형을 통일했다. 제자백가 가운데 법가 하나만을 공인했고, 다른 지식에는 접근을 불허했다. 아예 책을 모아 태우기도 했고 유생들을 땅에 묻기도 했다. 제국의 인민들은 주어진 직분에 맞춰 사고할 것을 요구받았으며, 법이 정한 범위 내에서만 행동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秦은 한 세대도 채우지 못한 채 무너졌다.

뒤이어 등장한 漢 제국은 진의 실패를 거울삼아 제국의 이념으로 黃老學을 들고 나왔다. ‘道法家’란 별칭에서 알 수 있듯이 황로학은 도가와 법가의 복합체이다. 無爲自然에 궁극적 가치를 두는 도가와 有爲의 한 극단이라 할 수 있는 법가가 한 몸을 이룬다는 것은 언뜻 허위에 가까워보인다. 그러나 황로학자들은 법의 근거를 자연에서 끌어오고, 자연을 매개로 도가의 道와 법가의 法을 일체화함으로써 그 둘을 하나로 빚어냈다. 그리고 이를 신생 제국의 통치 이념으로 내세워 秦-漢 교체기의 극심한 혼란과 건국 초기의 동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고자 했다.

그러다 한 제국이 안정기에 접어들자 이에 어울리는 새로운 제국의 이념이 요청됐다. 그럴 즈음의 황제는 武帝였다. 그는 제국의 새로운 이념을 정초하고자 널리 하문하였고, 董仲舒란 유학자가 올린 대책을 받아들여 유교를 제국의 새로운 이념으로 선포하였다. 그리고 “유교만을 존중하고 다른 지식을 축출함(獨尊儒術, 罷黜百家)”으로써, 한대의 經學이라고도 불리는 유교가 체제교학으로 우뚝 서게 됐다.

일견 법가만을 공인하며 분서갱유를 자행했던 진시황 시절이 반복되는 듯했다. 그러나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때와는 사뭇 달랐다. 한대의 경학은, 명색은 유가였지만 실질은 유가와 법가의 복합체였다. 유가와 법가는 상대의 긍정이 자신의 부정으로 직결될 수 있는 대립적인 지식체계였다. 그럼에도 제국의 유생들은 그 둘을 하나로 주조하여 제국의 통치에 참여하고자 했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이로써 제국 지속의 요결 중 하나인 ‘外儒內法’, 그러니까 “밖으로는 유가를 표방하고 안으로는 법가를 취한다”는 노선이 체제교학의 이름으로 공식화됐다.

사실 유가의 이러한 운신은 낯선 게 아니었다. 전국시대 荀子는 공자의 사유에 법가의 사유를 접목함으로써, 공자의 사유를 장래 펼쳐질 대일통의 시대에 걸맞게 변이시킨 바 있었다. 한 제국을 대표하는 경학가 鄭玄은 한의 법가적 통치를 유가의 경전으로 정당화하는 과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는 말을 듣는다. 魏晋시대에는 도가의 관점에서 유가의 학설을 재해석한 玄學이라는 새로운 학술이 출현했다. 도가를 꾸준히 이단시해온 유가였던지라, 현학은 유가와 법가, 법가와 도가의 융합만큼이나 ‘기존의 경계를 허무는’ 파격 그 자체였다.

그런데 宋 제국에 이르자 유가의 이러한 변이는 파격은커녕 거의 기본이었다. 앞선 왕조들처럼 유교를 제국의 이념으로 채택한 송은 유가 경전에 대한 해석의 체계를 확립하고자 했고 그 결과로 ‘十三經注疏’가 완성되었다. 이는 13종의 유가 경전에 대한 역대의 주석 가운데 제국이 선택한 주석을 정통으로 공인한, 유가 지식체계의 집대성이자 총화였다. 그렇다고 거기엔 유가다운 주석만이 들어있다고 여겨서는 곤란하다. 예컨대 역경의 주석본으로는 위진시대 현학을 정초한 王弼이 도가의 관점에서 붙인 주석 채택되었다. 정통 유가의 주석이 아닌 현학의 주석이 정통으로 꼽힌 셈이니, 유가의 고갱이에는 그렇게 도가의 숨결이 스며들어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불가의 옷을 입은 유가’라는 언명처럼, 송 제국 이후 천여 년 간 동아시아를 석권한 성리학에도 이단의 숨결이 버젓이 배어 있었다. 불가는 이른바 ‘오랑캐’의 문물이란 점에서 朱熹로부터 견결하게 배척되었다. 그럼에도 그가 집대성한 성리학엔 불가의 흔적이 깊이 패여 있었다. 게다가 ‘오랑캐’에 대한 근본주의적 반응을 보인 성리학은 아이러니하게도 ‘오랑캐’인 몽골의 원 제국에 이르러 제국의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표방되는 것의 한켠에는 상극마저 융해해내는 역량이 처음부터 같이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배후에서 작동하는 힘

전근대시기만 그러했던 것이 아니었다. 현대중국은 ‘한 나라 두 체제(一國兩制)’를 표방하며 ‘중국적 사회주의’라는 국가이념을 현실로 옮기고 있다. 황로학자와 경학가, 성리학자들이 그러했듯이, 제국의 후예들은 목하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양극을 하나로 녹여내고 있다. 황로학부터 중국적 사회주의에 이르기까지 그 실상을 뜯어보면 상극의 지향들이 융합되어 있는 제국의 이념들, 그렇다면 이러한 史實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혹 제국을 통치하기 위해서는 ‘경계의 초극’이나 ‘모순의 공존’ 등이 필요하다는 깨달음이 그런 식으로 구현된 것은 아니었을까.

결국 경계를 넘나들고 모순을 동시에 껴안을 수 없는 지식은 결코 제국의 이념이 될 수 없었다. 일개 국가가 아니라 제국을 건설하고 운영하기 위해서는 이질적이거나 상반된 것들, 때론 상극이나 모순마저 한 데로 엮어낼 수 있어야 했음이다. 중국은 역대의 제국 이념들이 시사해주듯 그러한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했기에 그 넓은 지역을 오랜 세월 아우르며 제국의 역사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고전은 그런 중국의 배후였다. 제국의 이념들이 고전과의 건설적인 만남을 통해 배태된 데서 알 수 있듯이, 고전에는 제국의 이념을 그렇게 빚어낸 역량이 오롯이 담겨 있다. 이천년을 상회하는 중화제국의 역사를 빚어낸 숨은 손은 그렇게 ‘한낱’ 고전에 불과했던 것이다.

김월회 서울대·중어중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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