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3 16:45 (화)
明洞繁昌記 혹은 무지개 다리의 백일몽
明洞繁昌記 혹은 무지개 다리의 백일몽
  • 황호덕 성균관대·국문학
  • 승인 2012.05.09 11:0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문학 속 伏字로 존재한 명동

명동에 대한 묘사, 경성의 심장부에 대한 묘사가 종종 ‘파리’라는 모더니티의 수도와 관련해 언급됐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명동은 그리니까 파리로 가는 ‘다리’였다. 예컨대 在朝日本人들이 즐겨 불렀다는 「경성행진곡」의 1절은 이렇다. “나가가면 대륙, 라일락 피는 파리여/ 돌아서면 내지니, 은행나무 가로수길/ 경성 아름다운 곳, 남과 북의/ 무지개 다리, 그 한가운데.” 또한 ‘명동작가’라고 불린 전후 소설가 이봉구에게 “명동성은 항상 먼 나라(가령 파리)와 통해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이 불야성과 백일몽의 땅이 그리 밝은 희망의 장소였던 것만은 아니다.

1930년 경의 명동 입구

이를테면 식민지 시기 내내 27% 내외를 오갔던 경성 내 일본인 비율이나 이들의 주거지역인 경성의 남서부(명동, 충무로 일대)의 번창을 생각해보면, 거의 의아스럽다 싶을 정도로 명동이나 명동의 일본인을 직접적으로 그려낸 소설은 드물다. 명동을 상세히 묘사한 한국문학이나 한국영화는 일본인들과의 관계를 그린 소설이 비교적 희소한 것과 같이 그 사례가 많지 않은 것이다. 이를테면 이상의 「날개」, 박태원의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이나 심훈의 『영원의 미소』, 채만식의 「종로의 주민」과 같은 소설에 종종 ‘혼부라’(本ぶら, 긴자 산책을 패러디해 혼마치 산책을 이르는 말)와 관련된 삽화들이 등장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자네 진고개 구경하얏나?’ ‘하고말고, 서울 갓다가 진고개 안 보고 구경이 무슨 구경인가’ ‘그래 엇더튼가. 시계줄 잡고 그네 뛰는 아색기 보앗나’ ‘보다 뿐이겠나. 지구뗑이 안고 쌩쌩 매암도는 아색기까지 보았지’”(『별건곤』)라는 대화에서 엿보이듯 그야말로 명소이자 욕망의 분출구였을 명동 일대에 대한 심각한 묘파는 놀라울 정도로 드문 편이다.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본점인 미치코시백화점 위에서 펴들던 룸펜 이상의 아이러니한 「날개」는 오히려 희소한 사례다.

오히려 명동이 언급되는 경우는 대부분 “언니! ‘혼부라’ 안하시려우?”(박태원, 『여인성장』). 또는 “‘날도 이렇게 풀렸는데 우리 홈부라나 한번 하고 들어가자꾸나’ 하고 백화점을 난서는 계숙의 외투 소매를 끌어당긴다.”(심훈, 『영원의 미소』)는 식으로 주로 여성들의 속절없고 부나방 같은 욕망을 표시하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의 명동 쇼핑거리

채만식의 표현대로라면 ‘두고 먹는 골’은 아닌 ‘여행’의 공간이었던 셈이다.(「종로의 주민」) 그렇다고 할 때, 이러한 일본인 혹은 일본인의 공간에 대한 소략한 흔적이야말로 식민지 안에 존재하는 내적 국경의 문제를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 일종의 ‘생략의 전략’이었던 것 같다. 있어도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연습이라고 할까.

위에서 인용문에 나오듯 ‘구경’, ‘여행’의 공간이었지 한국인의 삶의 공간은 아니었던 셈이고, 누구의 모더니티였냐 하면 일본인들의 그것이었던 것이다. 한국인의 삶을 결정했지만, 한국인이 결정하는 주 권역은 아닌 곳. 종로와 거리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었지만, 이 욕망의 분출구는 언어를 통해 표현되는 장소로서 보다는, 화폐를 통해서 매개되거나 ‘구경’이라는 심리적 동경의 형태로 표출되는 그런 공간이었다.

內鮮共學이 이뤄지고, 내선일체가 소리 높여 외쳐지기 전까지는 일종의 민족분리정책(Apartheid)을 연상시킬 정도로 명동과 명동의 일본인들은 문학의 영역에서 일종의 伏字로서 존재했던 것이 아닌가 싶다. 근대에의 욕망과 피식민 무의식이 교차하는 곳에 ‘명동의 번창과 문학적 생략’이 놓여있었다 하겠다.

현재의 명동

2012년. 서울 명동의 땅 한 평을 팔면 가장 싸다는 시골 땅 50만평을 살 수 있다 한다. 일본인이나 중국인으로 북적대는 명동 상권은 해마다 발표되는 전국 地價의 1위부터 12위까지를 ‘올킬’하는 대한민국의 입구이자 얼굴인 장소다. 오늘날의 일반인들로서는 몸 한자락 누일 자리도 얻기 힘든 금싸라기 땅이지만, 조선말까지만 해도 명동 일대는 비만 오면 땅이 질어 진고개로 불렸던 가난한 딸깍발이 선비들의 땅이었다. 싼 지가 때문에라도 한일합방 전후에 일본인들의 이주가 집중됐던 곳인데, 식민지 시기 이래로 서울의 확고한 중심이자 자본주의의 백일몽을 상징하게 됐다.

그러나 식민지의 작가들은 메이지도리(明治通り)나 혼마치보다는 ‘살여울’(이광수, 『흙』)이나 ‘청석골’(심훈, 『상록수』), ‘원터’(이기영, 『고향』)와 같은 극히 로컬한 공간에서 조선의 얼굴을 찾곤 했다. 아니 메이지도리와 혼마치를 잊기 위한 否認의 전략이 한국근대문학을 결정했는지도 모른다.

명동이 문학적, 문화적으로 가시화된 것은 오히려 식민지 기억의 삭제를 통해서였다. 냉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며, 미국의 영향력이 절대적인 것이 되자, 이 ‘파리’ 혹은 ‘내지’로의 다리는 ‘뉴욕’의 환상으로 뒤바뀐다. 예컨대 백철은 전후의 명동을 “한국의 시인과 작가들에겐 하나의 그리니치 빌리지. 한국의 문학과 예술의 자유촌, 낭만의 거리, 그리해 뮤즈들이 박쥐와 같이 환상적인 날개를 펴”는 공간으로 묘사했다. 어떤 의미에서 한국근대문학이 생략하고 싶어한 이 모더니티의 ‘다리’ 명동이 앞으로 어디로 가는 다리로 의미화되는지에 따라 한국현대사도 격동하게 될 것이다.

황호덕 성균관대·국문학
성균관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일본 도쿄대 총합문화연구과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벌레와 제국』,『 전쟁하는 신민, 식민지의 국민문화』,『 프랑켄 마르크스』등의 저서를 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