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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말의 비엔나 혹은 '밤 안개 속의 사랑'
세기말의 비엔나 혹은 '밤 안개 속의 사랑'
  •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 승인 2012.05.07 14: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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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목의 유랑·상상·인문학 17. 오스트리아의 수도 빈에서(1)

오스트리아의 유명 산악인 하인리히 하러가 혹한의 히말라야 산정을 오르다 미끄러져 내리고. 등반 중 2차 세계대전 발발. 낯선 땅 티베트에서 이방인이 되어 우여곡절 끝 14대 달라이라마를 만나 차츰 불교 속으로 걸음을 옮기는데. ‘산악=바깥세계’가 결국 내면여행으로 변환할 즈음, 2차 세계대전은 끝나고, 아내는 영영 그를 떠난다. 흥미롭게 몇 번을 보았던 영화「티벳에서의 칠년」. 색 모래로 만다라를 함께 만든 뒤, 다시 그것을 지워버리는 일. 승려들의 숨결에 휘날리는 색 모래 알갱이들. 無量無量 피었다 지는 언덕배기의 꽃들, 그 無常처럼. 아름다움은 고통이고, 고통은 아름다움이다. 그러나 그것도 끝내 허물어지고 만다.  

 프라하에서 오스트리아의 수도‘빈’으로 가는 길. 내 기억의 호주머니 속엔, 하필 꼬깃꼬깃 접힌 이런 몇 겹의 회상으로‘오스트리아’란 이름 자락이 휘날리는가. 빈에 ‘비엔나 커피’가 없다는데, ‘세기말’이란 단어에 감미롭게 휘감기는‘빈’. 영어로는 비엔나(Vienna). 오스트리아의 북동쪽, 도나우 강변에 위치한 세계적 예술도시다.

벨베데레 상궁에서 본 하궁 및 빈 시가지 모습. 사진=최재목

빈에 도착해 나는 ‘좋은(bel) 전망(vedere)’이란 뜻의 ‘벨베데레’上宮 회화관으로 먼저 간다. 빈 분리파의 창시자 구스타프 클림트의「키스」가 보고 싶어서다. 당시 보수주의를 벗어나, “시대에는 그 시대의 예술을, 예술에는 자유를”이라고 외쳤던 클림트. 생전에 거의 글을 남기지 않았고, 남긴 거라곤 메모 정도. 그는 말한다. “그러나 아쉬워할 것은 없다. 예술가로서의 나에 대해서 알고 싶다면, 그림을 주의 깊게 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고자 했는지 살피면 된다.”

클림트의 그림엔 無常과 허무, 고요와 침묵이 넘친다. 姙婦를 둘러싼 괴물들(「희망Ⅰ」), 우울한 임부와 여인들(「희망Ⅱ」)에서처럼, 탄생은 죽음이고 불행이었다. 고타마 싯달타가 아들이 태어나자 ‘오! 장애(=라훌라)로다!’라고 했던 것처럼. 아크리시오스가 딸 다나에를 지하의 청동으로 된 방안에 가두어 놓고 어떤 남자도 접근할 수 없도록 하자, 하늘에서 이를 지켜보던 제우스는 황금 빗물로 변신해 그녀의 두 무릎 사이로 스며들어 교접하고, 페르세우스를 낳는다. 클림트의 그림「다니에」엔‘無明·╼識·名色’이 축약돼 있다.

王家를 상징하는 독수리 문장을 단, 그리스 신전 양식의‘글로리에테’옥상에서 바라 본 쇤부른 궁전과 빈 시내. 숲을 보면서 왕가 사람들의 사냥하는 모습을 떠올린다. 사진=최재목

발길을 돌려, 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王家의 여름 별장 쇤브룬 궁전에 걸어든다. “평평한 들판에 오르지 말라. 너무 높이 올라가지 말라! 세계는 중간 정도의 높이에서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는 니체의 말을 되새기지만, 결국 나는 너무 많이 걸어 오르고 만다. 궁전의 정원 끝 언덕. 왕가를 상징하는 독수리 문장을 단, 그리스 신전 양식의 ‘글로리에테’의 옥상에 서서, 사방을 굽어본다. 옆과 뒤로 사냥터였던 숲이 펼쳐지는데. 그건, “내 마음 속에 떠오르는 모든 것은 나의 근원에서 떠오르지 않고 내 마음의 중간쯤 어디선가에서 비로소 떠오르다”는 카프카의 말(26세,『일기』)처럼, ‘중간쯤’높이에서, 무언가 내게 읊조리려 한다. 하지만 글이 되지 않는 어설픈 흔들림뿐.

숲속의 사냥, 그것은 왕가의 多産에 필요한 남성성의 과시이자 신체단련용 스포츠, 그리고 전쟁 능력을 평소에 습득하는 한 방법이다. 고대 중국에서 그랬듯, 중요한 건 자신들이 통치하는 고유영역의 관리이자 순례이며, 그런 능력을 배양하는 행위이다. 정원을 내려오다 미로정원에 발길이 닿는다. 迷路라. 안개 속이다.

쇤부른 궁전 내 미로정원. 사진=최재목

‘고요한 안개 속에 헤매는 이 밤/깨어진 사랑의 가슴 아파서/정처 없이 걷는 이 발길/아 쓰라린 가슴 못 잊을 추억이여/고요한 안개 속에 사랑을 불러본다’. 29세로 요절한 가수 배호의「밤안개 속의 사랑」같은 건 아닐까. 세계는‘의지’와‘욕망’의 표상. 구스타프 클림트나 구스타프 말러가 쇼펜하우어와 니체에 열광했던 데 이해가 간다. 자욱하게 밀려오는 愛憎, 만남과 헤어짐, 질질 두 발을 끌며, ‘발이 부은 아이’오이디푸스처럼, 희미한 옛 사랑의‘그림자’를 찾아 헤매는, 그런 내면의 그림자인 무의식과 광기에 이끌리는 인간들. 세기말 빈의 예술가들은 바깥의 파란만장을 내면으로 이식시켜놓고 ‘나’를 해부하고 표현해갔다. 

세기말 빈, 어쩌면 가부장적, 嚴父적 사회시스템에 도전하던, 1970년대 군부 독재정권하의 한국 같기도. ‘그는 아버지의 다리를 잡고 개새끼 건방진 자식 하며/비틀거리며 아버지의 샤쓰를 찢어발기고 아버지는 주먹을/휘둘러 그의 얼굴을 내리쳤지만 나는 보고만 있었다/그는 또 눈알을 부라리며 이 씨발놈아 비겁한 놈아 하며/아버지의 팔을 꺾었고 아버지는 겨우 그의 모가지를/문 밖으로 밀쳐냈다 나는 보고만 있었다’(이성복, 「어떤 싸움의 記錄」)처럼. 아버지를 후려갈기는 ‘그’를 바라보던 ‘나’의 시선이 한국에도 있었다. 권력-아버지를 죽이고자 했던 민중은 스스로도 짓밟혔다. ‘안개’는 그 시절의 의식적 도피처였고, 우울과 불안이 만들어 낸 ‘그림자’였다. 아버지가 사라진 자리로 찾아 든 건 뭘까. 황급히 끝난 왈츠 뒤의 적막감. 왈츠 곡인「다뉴브강의 잔물결」을「사의 찬미」로 번안, 줄곧 불러왔던 우리 사회. 그건 아버지의 죽음을 향한 우울한 찬미였던가.

최재목 영남대 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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