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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물음’과 전향적 길
‘역사적 물음’과 전향적 길
  • 김성민 건국대 교수
  • 승인 2012.05.07 1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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學而思

한국의 인문학이 과연 통일을 위해 어떤 작업을 했는가를 돌이켜 보면 부끄럽기 짝이 없다. 사람의 통일’이라면 통일을 만들어가는 데 정말로 토대가 돼야 하는 것은 ‘지인의 학’인 인문학이 아닐까. 그런데 그와 같은 작업이 우리의 인문학에서는 왜 이루어지지 않은 것인지를 생각하면 나는 심지어 자책감마저 들었다. 이것이 내가 통일인문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을 학계에 내놓고 싶었던 마음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인문학의 위기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지만 한국의 인문학에 진짜 위기를 가져온 것은 내가 보기에 ‘정전화’와 서구중심의 학문풍토이다. 사이드가 진단했듯이 1960년 말~1970년대 초 서구에서 인문학의 정전화는 반인문주의 운동이라는 역기능을 불러왔다. 인문학의 정전화는 정전의 신성불가침과 독해의 엘리트주의적 우월함에 대한 칭송만을 낳는다.

그러나 이런 정전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의 시대정신과의 결합을 파괴하며 그 실천적 동력을 상실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게다가 서구중심의 학문풍토는 타자의 시선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보며 이 땅의 민초들이 살아가는 구체적인 현실과 우리를 분리시키며 대학을 ‘상아탑’의 공간으로 바꿔 놓았다. 그래서 나는 인문학이 시대정신을 담고 있는 실천적 인문학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 분단체제는 너무나 깊숙이 우리의 신체에 아로새겨져 무의식적으로 반사적인 가치와 정서, 행위양식을 창출하는 아비투스가 돼버려 그것을 극복하기에는 실로 어려웠다. 그래서 우선, 나부터 그런 분단의 아비투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인문학의 성찰적 기능을 작동시키고 내 안에 새겨진 분단국가가 만들어 놓은 검열의 체계를 벗어나고자 했다. 그리고 그 속에서 분단이 우리 민족에게 남겨놓은 트라우마들이 생산하는 ‘적대의 정서’와 ‘전치의 효과’들을 사회병리적 증상 속에서 분석하고자 했다. 요즈음 내가 가장 많은 정성을 쏟는 통일인문학이라는 인문한국(HK)사업은 이렇게 시작됐다.

사업이 시작된 지도 벌써 2년이 훌쩍 지나가 버렸다. 그러나 그 속에서 나는 통일인문학의 가능성을 확인했다. 분단의 아비투스와 분단의 트라우마, 그리고 ‘사람의 통일’을 위한 ‘소통, 치유, 통합’의 패러다임을 그려가면서 우리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면서 우리는 통일인문학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이 사람들에게 주는 충격 같은 것들을 느낄 수 있었다. 오랫동안 분단극복과 통일을 위해 노력해 온 사람들조차 “왜 진작 이런 생각을 못 했을까”와 같은 뒤늦은 후회와 더불어 “맞아, 바로 이거였어!”와 같은 탄식의 소리들을 자주 듣는다. 이제 내가 가는 학문의 길에 좌표가 있다면 그것은 이 땅의 시대정신과 호흡하면서 실천적으로 시대를 극복하는 한국의 인문학이다.

최근 들어 통일인문학연구단이 가장 중점을 들여서 하고 있는 사업은 ‘민족공통성프로젝트’이다. ‘민족공통성프로젝트’는 작년부터 2년에 걸쳐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 등지에 거주하고 있는 한민족과 한국인 및 탈북자들을 상대로 ‘민족정체성’과 ‘역사적 트라우마’, ‘민족적 생활양식’, 그리고 ‘통일·분단의식’을 조사하고 이 조사결과를 가지고 비교·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그런데 이런 연구는 국내외를 막론하고 한 번도 이루어지지 않는 프로젝트로서, 요즈음 그 연구의 결실들이 하나씩 나오고 있는 중이다.

이번 연구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나는 다시 한 번 통일인문학이 내세웠던 ‘차이와 공통성이라는 소통의 패러다임’과 ‘분단의 사회적 신체를 구성하는 아비투스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이를 치유하는 패러다임’, 그리고 ‘통일의 사회적 신체를 창출하는 것으로서 통합의 패러다임’이 한반도의 분단극복과 통일에서 핵심이라는 점을 자각했다.

이런 점에서 나는 다시 한 번 한국의 인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내게 다시 묻는다. 그리고 다시 애초 시작했던 그 지점으로 돌아온다. 그것은 나를 향한 되새김이자 성찰적 반성의 좌표로서, 인문학의 보편성이란 우리가 앓고 있는 병과 한민족이 근대사에서 겪어야만 했던 고통이라는 ‘역사적 물음’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라는 자각이다. 그러나 이것은 한국의 고유한 전통으로 회귀해 한국적인 어떤 것을 찾아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우리 자신의 역사뿐만 아니라 인류사에 열려 있는 시대정신 속에서 서구적인 학문들을 우리시대의 문제들과 연결시키면서 하이데거가 말한 ‘전향(Kehre)’적 길을 찾는 것이리라.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전향의 길에서‘분단극복과 통일’의 인문학적 사유를 부여잡고 있으며 이것이 우리에게 새로운 실천적 길을 열어줄 것이라고 믿는다.

김성민 건국대 교수(철학과)
거국대에서 박사를 했다. 건국대 인문학연구원장, 통일인문학연구단장이다. 「분단과 통일, 그리고 한국의 인문학」, 『인문학자의 통일사유』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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