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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재와 장문인들
무거재와 장문인들
  • 강영환 울산대·건축학부
  • 승인 2012.05.07 11:5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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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연구실]

강영환 교수(오른쪽)와 박혜영(석사과정, 왼쪽) 연구원
울산에 내려온 지 벌써 30년이다. 대학이 소재한 지명이 무거동이기에 스스로 無去라 자호하고 연구실의 이름을 무거재라 칭했다. 비록 불교적 의미에서 비롯된 용어였으나 ‘과정과 상황, 일상성 속에서 즐거움을 발견한다’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이후 졸업생들 사이에서 ‘무거도사’라는 별칭으로 불려지고, 대학원 과정이 개설되면서 연구실 학생들이 스스로를 무거문파라 부르게 됐다. 이미 울산대 건축학과는 ‘울산학파’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었으니 그 안에 ‘무거문파’라는 계파를 개창한 셈이다. 

30년 전 나의 학문적 관심은 한국건축에 집중돼 있었다. 특별한 사명의식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한국인으로서 한국건축의 정체에 대한 의문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더구나 한국건축을 답사할 때면 이상한 기운을 느끼곤 했기 때문이다.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그윽하며, 때로는 청명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한국건축은 더 이상 낡고, 저급한 과거의 건축이 아니었다. 거기에는 서양건축에서 볼 수 없는 신비스런 생명력이 숨어있을 것 같았다.

당시 울산대 건축학과는 한국건축에 관한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연구집단이었다. 1976년 의인 섬마을을 시작으로 통도사, 남사마을 등 매 3년마다 실측조사연구서를 발간하고 있었다. 그러한 연구성과와 열정은 건축학계에서 ‘울산학파’라는 이름을 얻을 만큼 높이 평가받았다. 그곳에 교수로 초빙될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자 축복이었다. 본격적인 한국건축 연구의 산실이 마련된 것이다.

그러나 한국 건축이라는 전공주제는 지방 학생들에게 그리 매력적인 분야가 될 수 없었다. 현대건축 공부하기도 바쁜데 웬 옛날 건축, 옛날 건축 배워서 어디로 취직해, 그거 목수나 하는 거 아냐 등등 전통건축이나 건축역사에 대한 편견과 오해를 돌려놓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소수의 학생들은 끊임없이 내 연구실 문을 두드렸다. 이곳을 통해 어디로 갈 것인가보다는 이곳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를 더 소중하게 생각하는 학생들이었다.

당시만 해도 교수 연구실은 대학원생과 함께 쓰는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한국건축이라는 주제로 시간과 경험을 공유했다. 함께 먹고 공부하고 답사하고, 조사하고 분석하고, 술 마시고 토론하고, 흥이 나면 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단연코 아내나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보다는 그들과 함께한 시간이 더 많았다. 그때를 추억하는 졸업생들은 지금도 새벽 4시까지 술자리를 붙들곤 한다.

그들은 내 연구실에서 주인이 돼갔다. 스스로를 무거문파 장문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그들은 학생의 신분을 넘어 내 연구의 동반자였으며, 연구실의 관리자이며, 심지어 자식이기도 했다. ‘북한 주거연구’를 비롯한 수십편의 논문과 ‘한국 주거문화의 역사’를 비롯한 십여편의 저서, 그리고 서가에 가득한 연구보고서들은 모두 그들의 땀내로 생산됐다.

나는 그들에게 다음 장문인 후보를 추천할 자격을 줬고, 추천된 후보들을 평가할 권리를 줬다. 해마다 대학원 입시가 끝나면 지금도 전체 연구실 졸업생들이 참가하는 장문인 대회가 열린다. 1박 2일 동안 새 장문인 후보를 평가하고 그 결과에 따라 연구실 입학이 결정된다.

지난 20년간 무거문파 장문인들은 禮와 誠에 어긋난 적이 없다. 명절이나 생일조차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청출어람이라 했던가. 그들이 비록 사회적 명망이나 권세, 부를 이루지는 못했으나 사제 간의 정과 의를 실천함에서는 공자의 제자에 못지않다.

내 연구실에서 학문적 성과를 내세우기는 어렵지만, 좋은 사람을 키운 것만은 분명하다. 변변치 못한 선생을 스승이라 불러주는 제자들이 있기에 나는 행복하다. 무거재는 사무실도 실험실도 아니다. 무거재는 인간과 사회, 그리고 건축의 관계를 궁구하려는 사람들의 모임으로 존재하고 있다.

강영환 울산대·건축학부

연구실 정보
·주요 연구 키워드:
한국건축사, 한국주거사, 북한전통주거, 건축문화론
·2011년 연구비 예산: 약 5천만원
·연구원 수: 대학원생 1명
·연구원 장학금 및 복지혜택: 등록금 전액 및 생활비 보조
·LAB 크기/LAB 운영 방침/LAB최종 목표: 약 50㎡ / 신뢰성, 예와 성 / 한국건축의 현대화, 국제화
·대표저서: 『한국 주거문화의 역사』, 『집의 사회사』, 『한국의 건축문화재』, 『새로 쓴 한국 주거문화의 역사』, 『북한의 옛집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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