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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의 자기 객관화는 비판적 사고에서 출발한다”
“지식인의 자기 객관화는 비판적 사고에서 출발한다”
  • 이상신 고려대 명예교수·서양사
  • 승인 2012.05.07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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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의 글(<교수신문> 640호)을 보며

<교수신문> 640호(2012.4.16)에 실린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사회학)의 글 ‘지식사회의 황폐화를 우려한다’는 글에 대해 이상신 고려대 명예교수(서양사)가 반론을 보내왔다. <교수신문>은 지식인의 역할에 대한 토론을 공론화하기 위해 전문을 게재한다.


지식인이란 자신의 분야에 관한 전문지식을 갖추고서 이를 실천하는 사회적 존재다.  그는 우선 자기 분야의 지식을 학문적으로 더욱 심화시켜야 하며, 이것은 지식인의 학문적 소명이다. 또한 그는 자신의 분야에 해당되는 사회영역의 발전에 기여해야만 한다. 사회는 이것을 요구하며, 이를 실천하는 것이 그의 사회적 소명이다. 특히 사회적 소명에 힘쓰는 지식인들에게 사회는 일정한 정치적 기능과 역할까지도 기대하고 있다. 학문적, 사회적 소명에 힘쓰는 학자들, 정론에 충실하는 언론인들, 형평과 정의를 지키는 법조인들, 게르니카의 예술혼을 연상시키는 예술가들, 실천적 문화인들, 인도주의적 의사들과 특히 성직자들이 그러하다.

지식인들에게는 송복 연세대 명예교수의 이른바 ‘자기 객관화’가 필요하다. 이것은 학문적, 사회적 소명을 실천하는 데 다 같이 그 전제조건으로서 만하임의 ‘視覺의 換算’에, 또한 포퍼의 ‘虛構化’에 해당된다. 이것은 인식주체의 개인적, 집단적 정체성과 위치 및  한계를 파악하고, 기존의 이론과 현실을 그 모순 및 오류와 함께 보다 더 사실적으로 진단하는 데 필수적인 것이다. 새로운 이론과 사회를 위한 처방은 그 다음에 비로소 나올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자기 객관화는 안티테제를 세우는 작업에 속하며, 이를 통해 비로소 사회는 종합으로 나아간다.

주목돼야 할 바는 자기 객관화와 이를 통한 진단작업은 비판을 통해 모순과 오류를 확인하면서 진행된다는 점이다. 안티테제는 비판적 인식과정을 통해 형성된다. 요컨대 안티테제 자체가 테제에 대한 부정으로부터 출발한 것이고, 비판적 사고를 통해 새로운 이론과 사회의 형성 작업이 시작된다. 그러므로 비판적 사고는 모든 지식인에게 제 3의 요건이자 과제다. 지식인 자체가 비판적 존재다. 이를 의식하지 못하는 지식인은 기능적일 수밖에 없다. 이 안티테제는 저절로 종합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따라서 그 운반자들이 필요하며, 지식인이 그 주체로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지식인들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더 이상 운반자이기를 포기해 버릴 수 있다. 그러므로 지식인에게는 송 교수의 말대로 ‘대담한 용기’가 필요하다. 칸트의 계몽의 개념에서는 용기란 悟性(판단력)을 활용할 줄 아는 힘이다. 이 힘을 실행하는 이성의 본질적인 기능은 모순과 오류를 찾아내 현실을 합리적으로 만들고자 하는 데 있다. 비판적 지식인의 용기는 바로 그러한 것이어야 하고, 그러므로 그것은 이성적인 것이다. 그런가하면 송 교수의 ‘우파’ 지식인은 비판적 사고와 실천운동을 좌파라고 규정하고 있는 이상, 그 ‘대담한 용기’는 비이성적인 것일 수 있다.

송 교수는 우리의 지식인들을 보수파와 우파, 그리고 진보파와 좌파로 구분하면서 보수파는 건전하고, 우파는 행동적, 실제적이므로 필요한 존재들인가 하면, 좌파는 ‘과거 지향적, 퇴행적, 수구적’이며, 진보파는 ‘미래지향적, 발전적’이라고 규정한다. 그러나 지식인이 과거와 현재를 대상으로 해 사고하는 것은 학문적인 태도이며, 그는 미래를 분석할 수도 없거니와 학문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그는 안티테제를 세우고, 새로운 종합을 염원하면서 미래를 전망하며, 장차 일어날 수 있는 문제점들에 대해 민감하며 그 예방을 위해 관심을 쏟는다.

그러한 한, 과거와 현재에 대한 지식인의 비판적 진단을 ‘수구적, 퇴행적’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일본이 자신들의 과거를 은폐하는 것이 잘못일진대, 어째서 우리가 우리의 과거를 비판하는 것이 퇴행적인 것인가. 송 교수 자신이 자기 부정에서 출발하는 지식인의 자기 객관화를 요구하면서도, 과거와 현재에 대한 지식인의 비판적 태도를 배격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다. 지식인의 비판적 진단은 모순과 오류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지, 결코 무정부적, 교조적인 것이 아니며, 오히려 미래를 위한 것이다. 이것을 배격하는 지식인이야말로 수구적, 퇴행적이며, 결국 체제 옹호적이라는 점에서 우파라고 불리는 것이다.

송 교수의 ‘좌파’에는 비판적 지식인들이 포함돼 있다. 이 용어는 당파적 정치가들과 수구 언론이 사용하는 개념이다. 이 용어가 우리 사회에서는 비혁명적, 점진적 개혁을 도모하는 ‘진보파’라는 용어보다 더 강한 부정적인 의미로 작용하고 있다. 송 교수가 미래를 앞당기고자 하는 이른바 좌파를 오히려 ‘수구적, 퇴행적’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기묘한 반어법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으나, 비판적 지식인들이 모두 다 문제의 ‘좌파’로 보이도록 하는 것은 부적절하다. 비판적 지식인들이 좌파라고 불릴 수는 있지만 우리의 그들은 우파들이 부르고 싶어 하는 ‘좌파’는 결코 아니다. 그런데도 이 용어는 지금도 일반대중을 호도하는 데 효과적으로 활용되고 있다.

우리 사회에서는 보수적 지식인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송 교수의 주장은 맞는 표현이다. 보수주의는 전통문화를 존중하고 민족적이며, 정통성을 세우고자 하며, 필요한 변화와 점진적인 개혁을 인정한다. 특히 개인적, 민족적 명예를 지키며 명분을 추구하는 모습은 그들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전시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두고자 서명하는, 자긍심도 없는 전·현직 장성들을 꾸짖는, 또한 무기한 상태의 미군의 주둔, 그들의 철군 시기와 한국의 준비, 그들의 주둔비와 훈련비마저 감당해야 하는 한국의 부담 등의 민족의 자주성이 걸려있는 문제들에 관한 보수의 목소리는 있어 왔던가. 민족주의와 보수주의는 근거를 같이 하거늘, 통일론자들이 좌파라고 규정되고 있다. 이러한 모습들은 보수가 아니라 우파적이다. 지식인이 이러한 우파로 될 때, 그는 지식인의 도리를 배반할 수 있다.

지식인의 현실 비판에는 약자들의 불평등한 조건을 개선시키려는 인도주의적 감정이 작용하고 있다. 그리하여 지식인은 논리를 넘어서라도 약자의 편에 서게 된다. 왜냐하면 강자의 범법은 거의 어김없이 자의적인가 하면, 약자의 그것은 대개는 사회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서는 그 처벌이 정반대로 행해지는 경우가 많다. 재벌일수록 어김없이 사면되고, 실정법을 어긴 인사들이 심지어는 대법관까지 될 수 있다. 이러한 현상들을 흔히 ‘보수파’ 지식인들은 도리에 맞지 않게 간과하고 있다. 이것은 수구적인, 즉 비판 세력에 대해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위한 의도에서다. 그 사이에 보수가 지키고자 하는 사회윤리는 바로 우파에 의해 무너지고 있다.

모순과 오류가 비판을 통해 극복되기는커녕, 극대화의 경지에까지 이르고 있을 때, 보다 더 강력한 비판과 저항이 대중에게서는 일상적인 방법과 수준을 넘어서는, 기존의 행태와 언어 활용의 양식을 깨뜨리는 시도가 일어난다. 이것은 역사의 생물학적 현상으로서 필연적이다. 그 양상을 ‘좌파’의 ‘비정상적’, ‘폭력적’ 행태로서 ‘저질’이라고 지적하면서, 마치 비판적 지식인들도 그러한 양, 그 책임을 전가시킨다면, 비학문적이다. 강조하건대, 이러한 모습들은 사회적 현상이므로, 사회학적으로 원인을 부각시켜서, 그 치유를 위한 처방을 모색해야 하거늘 학자가 오히려 그 대신에 ‘행동하는 우파지식인들’의 출현을 희망하는 것은 잘못된 염원이다.

역설적으로 고맙게도, 역대 정권들은 많은 지식인들의 참여를 불러일으켰다. 대학의 총장들과 교수들이 역대 정권의 총리와 장관으로 나아갔고, 언론인들과 법조인들도 그러했다. 이들이 바로 ‘행동하는 우파지식인들’이 아닌가. 어느 사회에서나 그러한 변신은 가끔 있지만, 우리 사회에서 집단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이 현상은 직업윤리의 몰락을 의미한다. 교수와 법관 및 언론인은 자신들의 직업을 성직처럼 지켜야 하는 것이 도리인데도. 권력의 일익을 담당하는 참여는 지식인의 사회적 소명을 위한 참여로 보기 어렵다. 그것은 사회가 아니라 권력이 요구하는, 그러므로 정권의 합리화에 기여하는 참여다. 그는 비판적 사고를 더 이상 실천할 수 없고, 권력의 의도에 충실하다. 진보파든, 보수파든, 권력에 참여한 지식인들에게서는 마찬가지다. 그들 모두는 우리의 교육 환경, 사법 질서, 공론장을 그동안 파괴해왔다.

그럼에도 ‘행동하는 우파들’의 출현과 과거의 그 ‘충천하던 기백’을 불러내는 것은 대결을 촉구하는 도전이지, 상황을 해결하는 것이 못되며, 오히려 자신이 한탄하고 있는 지식사회의 황폐화를 스스로 재촉하는 행위다. 역사는 신앙 투쟁, 이념 대결, 계급 갈등에서 수많은 분쟁과 전쟁을 치루면서도 항상 종합을 이룩해왔다. 지식인의 비판은 그것을 위해서이며, 현실적으로는 정치의 도덕화와 사회적 원칙의 형성을 위해서다.


이상신 고려대 명예교수·서양사
독일 빌레펠트(bielefeld)대에서 ‘당파성과 객관성- 19세기 독일 역사가들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1976년 고려대 사학과 교수로 임용됐으나 1980년 시국 사건으로 해직됐다가 1984년 복직했다. 한국서양사학회장과 학교법인 덕성학원 이사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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