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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름] 관념의 뿌리부터 뒤흔드는 우리 사회의 변화들
[흐름] 관념의 뿌리부터 뒤흔드는 우리 사회의 변화들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2.07.10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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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10 09:28:18
지난 3일 부산지법 가정지원에서는 ‘특별한’ 판결 하나가 내려졌다. 법원은 이날 자신의 성적 지향과 사회가 정해준 성별 사이에서 갈등하던 성전환자(트랜스젠더) 윤모 씨가 “호적과 이름을 바꿀 수 있게 해달라”는 청을 받아들여 ‘호적 정정 및 개명 신청’에 대한 허가 결정을 내렸고, 윤씨는 호적에 표시된 성별과 이름을 바꿀 수 있게 됐다. 이로써 그는 호적을 바꾼 다섯 번째 성전환자가 됐다. 염색체 이상 등 ‘생리적 결함’ 때문에 법원이 호적 변경을 허락한 앞서 네 사람과 달리, 심리적·정신적 고통을 호소한 목소리를 들어줬다는 것이 이번 판결이 갖는 가장 큰 의미이다.

호주제 철폐에서 양심적 병역 거부까지

물론, 이것이 법원 전체의 생각이거나 사회 전체가 환영하는 견해는 아니다. 법정의 보수성이 시대 흐름을 따라오는 증거로 보기도 어렵다. 앞으로 모든 성전환자들의 호적이 바뀌리라는 보장도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신적, 육체적, 법적으로 완전한 성을 되찾은 그 사람의 인생이 다시 시작됐다는 점이다. 그가 법원에서 되찾은 것은 비로소 행복할 수 있는 권리다.

특히 성과 관련된 문제에 대해 철저하게 이중적인 잣대를 들이대는 우리 사회에서 성적 관념들이 변화하고 있다는 증거는 여러 군데서 찾아볼 수 있다. 지난 6월 여성부는 2007년까지 호주제를 철폐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국민 대부분이 철폐돼야 한다고 생각하고, 국회의원의 70% 이상이 법 개정의 필요성에 동의했음에도 요지부동이던 호주제가 드디어 폐기처분될 운명에 놓인 것이다. 예로부터 내려온 아름다운 전통이 아니라 사실은 일제가 효율적인 식민통치를 위해 급조한 악법이라는 사실이 밝혀진 지 한참인데도 꿈쩍 않던 호주제의 남은 생명은 이제 5년이다. 사실 고통받는 이들에게 5년은 너무 길다.

호주제가 폐지되면 가장 행복해 할 이들은 누구일까. 새 아버지와 姓이 달라 속 깊이 상처를 받고 자라는 어린이들, 남편이 바람 피워 낳은 아들을 호주로 올려놓고 가슴 찧는 여성들, 원치 않는 의무와 불합리한 권리의 이중 족쇄를 벗고픈 남성들, 평등한 결혼생활을 꿈꾸는 젊은이들, 셀 수 없이 많은 사람들이 비로소 행복해질 수 있다. 죽어자빠진 전통보다 중요한 것은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행복이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성적 소수자들의 목소리도 부쩍 높아졌다. 동성애자가 자신의 성적 지향을 밝히는 커밍아웃도 이제 일반인들에게 그다지 낯설지 않다. 삐딱한 시선과 은근한 혐오는 쉽게 걷히지 못하겠지만, 중요한 것은 ‘다름’을 인정하는 것이다. 너와 내가 다르고 나와 그가 다르다는 사실, 이 단순한 사실을 우리는 너무 오랫동안 잊고 살아왔다. 김진호 당대비평 편집위원은 “하나의 욕망을 갖도록 강요된 틀을 벗어나 ‘다른 욕망’을 꿈꿀 수 있게 됐다”는 말로 성 담론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그가 보기에 이 시대 가장 중요한 화두는 다름이다. 사람과 사회가 ‘다름’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 유연한 개인과 열린 사회를 향한 첫 걸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 담론의 변화는 상업주의의 촉수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성전환자가 상업화되고, 상업주의가 성 담론을 확산시키는 확대재생산이 오락가락하는 현실이다. 이에 대해 권혁범 대전대 교수(정치학)는 “성 담론에 상업주의가 끼어드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고 진단한다. 사회의 모든 흐름과 현상에 자본은 ‘민감’할 수밖에 없고, 상업주의가 성담론의 변화를 이용하는 것은 그만큼 가치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병역거부는 조금 다른 선 위에 있다. 지구상 유일한 분단국인 대한민국에서 병역이란 곧 거부할 수 없는 절대 가치와 같다. 비리를 저지르고 감옥살이를 하다가 나온 정치인이 몇 년 뒤 다시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하면 또 뽑아주지만, 아들을 군대에 안 보낸 정치인은 용서하지 않는 곳이 대한민국이다. 종교적인 이유든 개인적인 신념이든 신성한 국방의무 앞에서는 일단 접고 들어가야 한다. 그러나 완벽하게 단단한 가치란 없다. 하물며 그것이 획일화된 억누름을 양분으로 자라난 가치일 때는 더욱 그렇다.

‘여호와의 증인’을 종교로 갖는 집총거부자들에 대한 즉결심판이 연기되고, 박노자 오슬로대 교수(한국학)가 주장하듯 “젊은이들이 어떠한 종류의 폭력과도 가까이 해서는 안 된다고 믿기 때문에” 군대를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자가 생겨나면서 드디어 병역에 대한 논의가 세상에 드러나기 시작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거의 모든 나라들이 병역거부와 대체복무를 인정하고 것과 비교할 때 우리나라는 아직도 너무 낮은 포복으로 엎드려 있다.

획일화를 넘어서 근대를 불러온다

권혁범 교수는 “1987년 이후 10년이 ‘집단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시대였다면, 최근 4, 5년 동안은 ‘개인의 민주화’를 이루기 위한 시기였다”고 진단한다. 그러나 집단적 민주화에 대한 의식은 많이 넓어진 데 비해 개인적 민주화는 아직도 요원하다. 아직도 우리 사회는 집단의 가치가 개인의 ‘사소한’ 가치보다 앞선다고 믿고, 집단에서 튀는 개별적 주체를 인정하기 꺼린다. 모나지 말아야 하고, 튀지 말아야 하고, 둥글둥글하게 살아야 한다.

권 교수는 우리 사회의 뿌리깊은 집단주의가 드러난 예로 붉은 악마 현상에 대한 분분한 해석을 든다. 보수와 진보 가릴 것 없이 전문가들은 너나없이 붉은 악마 현상을 ‘공동체의 발견’으로 보았다는 것이다. “개인적이던 젊은이들이 비로소 붉은 옷을 입고 하나가 됐다”는 감격스런 말 뒤에는 ‘개인주의=이기주의=나쁜 것’이라는 뿌리깊은 편견과, 공동체주의로 가장한 집단주의 부활의 가능성을 발견한 이들의 안도감이 숨어있다면 지나친 억측일까. 그러나 실제 거리응원에 참여한 젊은이들이 발견한 것은 자발적으로 만들어낸 ‘즐거움’이다. “정치적 축제는 머리로 하는 거지만 이번에는 몸으로, 가슴으로 하는 축제여서 다들 즐겁게 동참했다”는 이들에게 공동체의 잣대를 들이대는 일은 뭔가 단단히 잘못 짚은 듯 보인다.

근대란 다름과 개인이 살아있는 사회라는 믿음은 그래서 유효하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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