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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그늘막 아래에서의 한숨
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그늘막 아래에서의 한숨
  • 전려진 제주대 연구원·수산학
  • 승인 2012.04.28 0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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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려진 제주대 해양과학연구소 연구원·수산학
‘나는 행복한 여자다.’ 지난 3년간 다른 이들에 의해 만들어진 지금의 나의 모습이다. 함께 공부를 시작해 학위를 먼저 받은 남편은 실력에 운이 더해져 단기간에 국립대의 전임교원이 됐고, 이후 나의 그날막이 돼 주었다. 그 동안 나는 결혼과 출산으로 연구 기간이 길어졌고, 2010년에야 비로소 원했던 박사 학위를 취득할 수 있었지만, 또한 그 시점부터 정체성의 혼란과 갈등이 시작됐던 것 같다. 한 가족의 아내이자 엄마라는 구성원으로서, 그리고 여성 과학자로서 어떠한 선택을 해야 하는지 많은 고민과 갈등에 스스로가 짓눌러졌다.

주변에서는 치열한 경쟁사회에 굳이 뛰어들지 않아도 돼 좋겠다는 시선들을 보내왔고, 나 자신도 그러한 기류에 어느 정도 편승했던 것 같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대부분의 취업 전선에서 자연스럽게 열외 돼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됐고, 변화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한국연구재단 신진연구자와 제주대 해양과환경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며 내 삶의 보람 있는 주인으로 다시 거듭나고자 결심을 했고, 미래 설계에 도움을 얻고자 WISET(한국여성과학인지원센터)에서도 활동을 시작했다.

그 동안 산발적으로 진행되던 여성 과학기술인 지원사업이 통합돼 올해 초에 한국여성과학인지원센터로 다시 발돋움했다는 소식을 접했고, 우선 여기서부터 변화의 실마리를 풀고자 했다. 그리고 제주지부 센터 사업에 무척 열성적인 여교수님 한 분을 만나게 됐고, 그 분에게서 오랜 기간 여성과학자로서 많은 어려운 일들을 경험하신 후에야 대학이라는 종착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는 것을 듣게 됐다.

과학은 그래도 객관적이고 공정하지 않느냐고, 나도 독립적인 여성 과학자 중의 한 명이 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해왔다. 남녀차별이라는 구시대적인 사상을 가진 것이 아니라 수산학계 뿐만 아니라 사회 전반적으로 남아있는 문제점들이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든든한 그늘막이 존재한다는 선입견으로 개인의 평가 잣대가 객관적이지 못하다는 것이었다. 육아와 가사를 전담해야 하는 여성은 정해진 시간에 학교나 연구실을 떠나야 하기 때문에 팀워크에 지장을 주거나 소외된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네트워크 형성을 위해 특별한 노력과 시간을 투자하고자 하면서 또 다른 딜레마에 빠지는 악순환이 계속되고 있다.

물론 사회의 모든 의식과 문화를 탓하는 것은 아니다. 무엇보다 우선시돼야 하는 것이 여성 과학기술인 스스로의 의식 변화이며, 여성의 의식 변화 없이는 국가의 어떠한 관련 정책도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나 스스로도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한 일환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연구활동 지원사업에 참여하게 됐다. 이것은 연구경력 개발의 중요시기에 있는 박사급 연구인력의 학회 참여 및 연수활동을 지원하고 결혼, 출산, 육아 등으로 인해 연구개발 능력이 중단됐거나 중단될 위기에 있는 여성 과학기술인이 경력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지원사업이다. 한국의 여성 과학자로서 세계적인 수산학 분야 연구자들과의 교류를 통해 잠재돼 있던 리더 마인드가 다시 일깨워졌고, 연구에 대한 자신의 자세를 되돌아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됐으며, 자신감의 회복에도 많은 도움이 됐다.

성공한 여성 과학자들은 자신들이 성공했기 때문에 다른 여성들이 경험하는 문제를 일반화하는 것을 꺼려하거나 우습게 생각할 수도 있다. 본인 스스로가 유능하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고 믿기에 간혹 여성의 문제를 능력이 부족한 여성의 문제로 간주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성공한 여성 과학자들의 관대하고 포용력 있는 조언은 여성 과학기술인들이 자부심과 전문능력을 갖춘 역량 있는 과학자로 성장하는 데 좋은 밑거름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나의 적극적이지 않은 부분들을 겸손함이라 생각하며 생활해 온 것은 아닌지 돌이켜본다. 그리고 ‘나는 행복한 여자다’보다는 그늘막을 과감히 걷어내고 ‘나는 행복한 여성 과학자다’라고 스스로에게 얘기할 수 있는 날을 위해 한걸음씩 전진할 것이다.


전려진 제주대 연구원·수산학
부경대에서 수산생물 질병과 항생제 내성 연구로 박사를 했다. 현재 제주대 해양과학연구소 연구원으로 있으면서, 양식생물 질병을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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