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19 05:05 (금)
[학이사] 백묵으로 밥 먹기
[학이사] 백묵으로 밥 먹기
  • 교수
  • 승인 2002.07.10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2002-07-10 09:35:34

꿈을 꾸었다. 어떤 낯선 사나이와 마주하고 있었다. 어둠 속의 그 사나이의 얼굴 윤곽은 선명치 않았으나, 분명히 그는 나를 섬뜩하게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소리쳤다. “너, 염상구 맞지?” “아냐……” 나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너, 이명준 같은 놈이지?” 그가 재차 물었다. “아니야……” 나는 더욱 더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럼 대체 넌 뭐야?” 그가 다시 소리쳤다. 참 기괴한 일이었다. 내가 그가 됐다. 나는 그보다 훨씬 앙칼지게 소리쳤다. “너, 염상구 맞지? 너 이명준 같은 놈이지?” 그는 대답 대신 잠시 공허한 눈초리로 나를 바라보고는 뒤돌아 도망가려 했다. 뒷모습을 보이며 도망가는 그 사나이의 검은 외투자락은 바람결에 흔들렸는데, 두 발은 서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 채 나로부터 멀어져 갔다.

섬뜩한 느낌으로 눈을 떴다. 거실의 소파에서 정장을 한 채로 골아 떨어졌던 모양이다. 어제 저녁 제자들과의 과음 때문이었다. 취중기억은 분명치 않았지만, 내가 제자들에게 되풀이해서 소리 지른 것은, “공부, 그 따위로 하려면 때려 치워!”였다.

문을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우리가 토해내는 수식과 언어는, 남에게 의미가 있어야 했다. 자폐에 가까운 학문적 편협함이나 기회주의적 안빈낙도는 우리에게 내부의 적, 제 1호가 됐다. 우리는 이십대에 이러한 도덕률을 가슴에 품었으며, 그 후 우리의 일상은 연구과정에서의 좌절과 보람이 되풀이되는 여정으로 채워져 왔다.

삼십대 후반의 K교수와 C교수가 한 아파트의 같은 층에서 이웃해 살고 있었다. K교수는 가정적이어서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같이하는 편인데 반해, C교수는 연구에 미쳐 일요일도 없는 처지인지라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늘 그러하듯이 C교수가 밤늦게 지친 몸으로 집에 돌아와 늦은 밥상을 받았는데, C교수집 아이들이 칭얼대기 시작했다. “아빠! 앞집 아이들은 오늘도 아빠랑 재미있는 데 놀러갔었대.” 토요일 저녁인데도 대학원생들의 안일한 연구자세를 꾸짖고 저기압이 돼 돌아온 C교수, 뱀눈을 하고 마누라에게 일갈하기를, “이 놈들, 앞집 K교수네로 입양시켜, 당장!” 라고 했다나.

다음 세대를 가르친다는 것은 또 얼마나 힘든 일인가. 미국의 ‘아이비리그’에 속하는 어느 대학의 화학과에서 있었던 일이었다나. 노벨상 수준을 넘나들던 어느 원로교수는 수업을 할 때마다 학생을 보지 않고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강의를 했다고 했다. 졸업식장에서 학생들이 여쭸단다. 왜 그러셨냐고. 그 노교수가, “나의 지식이 초라해서, 자네들 인격의 소중함이 늘 부담스러웠다네.” 라고 대답하시더란다.

백묵을 잡고 살아간다는 것의 윤리적 명제를 위한 우리들의 잣대는 너무 소박한 리트머스 시험지였는지도 모른다. 연구하고 교육하는 행위의 과정에서 흔히 범할 수 있는 나의 파렴치함과, 내 연구 영역의 편협성은 물론, 주어진 연구 현실에 대한 온당치 못한 대응 방식에 관련된 죄의식이나 갈등의 늪에서 흐느적거리는 나약함이라는 양극단의 사이만을 측정할 수밖에 없는, 그런 저급한 리트머스 시험지 말이다. 진정 올라야 할 보편성이라는 고지는 늘 멀리 느껴졌지만, 그러면서도 우리들은 늘 예서 말 수는 없다고 서로 다독거려왔다. 그리고 늘 꿈을 꾸어왔다. 지친 모습으로 어디에론가의 도피를 꿈꾸지 않고, 내가 있던 이 자리에서 홀로서기와 피부색이 다른 사람들과 서로 학문적으로 보고파 하기를. 그래서 우리의 학문하기가 세대간 단절이나 이웃으로부터의 고립에서 자유로와 지기를.

힘겨운 삶을 옹골차게 헤쳐 오셨으며, 그 단아하고도 장엄한 거둠의 모습을 남겨 놓고 우리 곁을 떠나셨던 연변의 노작가 김학철 선생님이 떠오르는 이유는, 단순히 개인적인 나의 기질이나 취향 때문일까. 그리고 ‘굳바이 미스터 칩스’의 칩스 선생님. 백묵으로 밥 먹기의 고된 삶을 택한 우리들이 진정 그리워할 수 있는 사람들의 전형을 이 분들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뜨거운 태양을 향해 힘차게 뿜어대는 일청담의 분수가 아름다운, 대구 인근 대학에 있는 제자 교수들을 강제로 끌어내어 시원한 맥주를 나누고 싶은, 그런 대구의 전형적인 여름날 오후였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