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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다’야말로 학문의 첫 출발이자 근본
‘수다’야말로 학문의 첫 출발이자 근본
  • 성해영 서울대 HK교수·종교학
  • 승인 2012.04.25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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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본 인문한국 사업

부산 아미동은 근현대사의 드라마가 펼쳐진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을 위한 화장장과 공동묘지가 있었다. 한국전쟁 뒤 피난민들이 이주해 와 묘지 위에 천막을 치고, 판잣집을 만들면서 마을을 형성했다. 구도심이라 불리며 쇠락해가던 아미동은 지금 ‘산동네 르네상스’ 사업으로 도시 재개발의 방향성을 담고 있는 상징적 공간이 되고 있다. 부산시가 재개발이 아닌 재생 사업으로 방향을 잡은 데에는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의 차철욱 교수팀이 한 연구가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차 교수팀은 아미동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인터뷰해 잊혀져가는 공동체 정신을 재조명했다.

인문학 부흥을 내걸고, 인문학의 새롭고 창조적인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2007년 출발한 인문한국(HK) 지원사업의 참모습은 연구 성과에만 있지 않다. 장시간의 노력과 학제적 접근이 필요한 총서 출간, 세계적 수준의 영문저널 발간은 어찌 보면 기본이다. 지역사회 문화 창출과 다양한 사회계층·세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인문학을 모색해 가고 있다. 연구 성과를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축해 지식의 사회적 접근과 전수를 확대해 가는 것도 HK연구소의 몫이다. <교수신문>은 한국연구재단과 공동으로 ‘인문학, 새로운 도전을 찾아서’란 기획 시리즈를 이번 호부터 시작한다. 지난 5년간의 성과를 되짚어 보는 프롤로그에 이어 다음 호부터는 HK연구소를 차례로 들여다볼 예정이다.

성해영 서울대 HK교수·종교학
인간은 파라다이스를 꿈꾼다. 현실이 각박할수록 행복한 공간에 대한 욕구는 더욱 커진다. 꿈은 한편으로 고통과 힘겨움을 이겨내게 만들고,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을 바꿀 힘을 주기도 한다. 여기에 운과 노력이 더해진다면 파라다이스는 현실이 되기도 한다. 인문한국(HK) 사업이 인문학자들의 꿈이라고 주장하면 과장일까. 서울대 인문학연구원에 몸담고 있는 필자에게 그건 그저 빈말로 들리지 않는다. 어떤 점에서 그럴까. 무엇보다 장기간에 걸친 대규모 지원 사업인 인문한국 사업은 보다 긴 호흡과 다양한 관점을 우리에게 허락했다. 그 점에서 인문학의 가능성을 모색하는 계기였고, 결국 이전에 없던 새로운 연구 공간의 창조라는 형태로 드러났다.

인문학연구원은 현재 21명의 인문·사회분야 전공자들이 함께 모여 있다. 그러니 서로 다른 시각과 세계관이 만나는 것은 당연하다. 그리고 이 만남은 우리의 관점과 시야의 확장으로 이어진다. 이런 종류의 경험은 직접 겪기 전에는 그 즐거움과 가치를 알 수가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인문한국 사업이 만들어낸 경험들이라고 해야 할까.

인문학 분야 연구자들은 통념과 달리 남들의 전공에 대한 침해를 꺼린다. 토론에 익숙하지 못한 문화에다 분과별 전문성을 지향하는 현대 학문의 성향이 그 주된 이유인 듯하다. 학연에다 선후배, 사승 관계까지 얽히면 토론은 더더욱 어렵다. 인문학연구원은 이점에서 매우 파격적이다. 전공, 나이, 성별은 걸림돌이 아니다. 상호 존중의 바탕 위에서 다른 곳에서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비판과 토론이 이뤄진다. 그래서 우리의 토론을 처음 접해 본 사람은 십중팔구 놀라기 마련이다. 저래도 되나 하고.

서로의 감정만 상하지 않는다면 열띤 토론만큼이나 학문하는 사람들에게 소중한 게 있을까. 학자는 본래 대화를 통해 발전하고, 남을 발전시켜주는 존재가 아니던가. 인문학연구원에서는 식사 때나 산책을 할 때나, 아니면 함께 커피를 마실 때나 시종일관 공부에 대해 얘기한다. 이런 과정이 계속되다 보니, 어떤 사소한 주제이건 모든 얘기들이 끝날 무렵에는 학문적 외양을 띠고 마는 기이한 현상마저 생겨났다. 이 모습을 직접 본 외부인들은 참으로 부러워한다. 요컨대 끊임없는 ‘학문적 수다’가 보기 좋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수다야 말로 학문의 첫 출발이자 근본이 아닐까.

그래서 우리는 자유스러운 대화를 통해 서로를 발전시키는 이 공간을 좋아한다. 하지만 이게 쉽지는 않았다. 서로 다른 전공에다 머리가 다 컸다고 여기는 사람들끼리 모였으니 오해와 갈등은 필연적이었고, 그 탓에 연구소를 운영하는 데에도 시행착오가 많았다. 하지만 실패를 다 겪고도 무너지지 않는다면, 남는 건 성공밖에 없다지 않던가. 이런 과정 끝에 미운 정 고운 정이 서로에게 피어났고, 이곳의 소중함을 실감하게 됐던 것이다. 

파라다이스란 결국 구성원 모두가 행복한 공간이 아닐까. 우리 연구소가 조금 더 행복한 공간이 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돌이켜 보니 함께 한 식사와 술자리, 그리고 같이 마셨던 커피가 주된 원인인 듯싶다. 인간적인 친교와 부대낌이 비결이라는 의미다. 이렇게 보면 학제적 연구 혹은 공동연구란 실상 장기간의 친교로 서로를 존중하게 된 자유스러운 학문 공동체가 그 근간이 아닐까. 특히 연구 결과를 쥐어짜는 분위기는 구성원의 행복은 물론이고, 창의성과 자발성에도 치명적인 것임에 분명하다.

HK사업은 인문학연구원 구성원들에게 ‘행복한 수다’를 선물했다. 그 탓에 이곳은 처음 출발했을 때보다 더 행복한 공간이 됐다. 그리고 행복은 앞으로 더욱 커질 듯하다. 시행착오로 고통도 함께 경험했지만, 이 공간의 소중함을 알게 된 우리들이 힘과 지혜를 모아 이 곳을 지키려 하기 때문이다. 학자들이 수다를 떨면서 행복해지고, 그 수다들이 이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연구 결과로 나타난다면 ‘행복한 한국(HK: Happy Korea)’은 저절로 우리 곁에 오지 않을까.


성해영 서울대 HK교수·종교학
미국 휴스턴 라이스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로 재직하면서 종교심리학과 신비주의 분야를 연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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