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아미동은 근현대사의 드라마가 펼쳐진 곳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을 위한 화장장과 공동묘지가 있었다. 한국전쟁 뒤 피난민들이 이주해 와 묘지 위에 천막을 치고, 판잣집을 만들면서 마을을 형성했다. 구도심이라 불리며 쇠락해가던 아미동은 지금 ‘산동네 르네상스’ 사업으로 도시 재개발의 방향성을 담고 있는 상징적 공간이 되고 있다. 부산시가 재개발이 아닌 재생 사업으로 방향을 잡은 데에는 부산대 한국민족문화연구소의 차철욱 교수팀이 한 연구가 결정적 계기로 작용했다. 차 교수팀은 아미동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인터뷰해 잊혀져가는 공동체 정신을 재조명했다.
인문학 부흥을 내걸고, 인문학의 새롭고 창조적인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2007년 출발한 인문한국(HK) 지원사업의 참모습은 연구 성과에만 있지 않다. 장시간의 노력과 학제적 접근이 필요한 총서 출간, 세계적 수준의 영문저널 발간은 어찌 보면 기본이다. 지역사회 문화 창출과 다양한 사회계층·세대의 요구에 부응하는 인문학을 모색해 가고 있다. 연구 성과를 디지털 아카이브로 구축해 지식의 사회적 접근과 전수를 확대해 가는 것도 HK연구소의 몫이다. <교수신문>은 한국연구재단과 공동으로 ‘인문학, 새로운 도전을 찾아서’란 기획 시리즈를 이번 호부터 시작한다. 지난 5년간의 성과를 되짚어 보는 프롤로그에 이어 다음 호부터는 HK연구소를 차례로 들여다볼 예정이다.
이른바 인문학의 위기는 인문학의 공급과 수요를 모두 위축시켰다. 중소 규모의 대학들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 사회에서 손꼽히는 주요 대학들도 구조조정의 명분 아래 인문학과들을 통폐합하는 사태가 줄지어 발생했다. 인문학 관련 서적들은 외면당하고 출간 자체가 힘들어졌다. 그 결과 인문학의 사회적 기능은 거의 마비되고 인문학자의 대가 단절되는 듯한 형편이 됐다.
2007년 인문한국(Humanities Korea, HK)의 출현은 이런 인문학의 위기를 반전시키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정부가 인문학의 진흥을 위해 매년 4백억 원이 넘는 예산을 10년간 지원하는 이 사업은 천년 문화국가의 저력이 아직 살아있음을 보여주는 획기적인 사건이었다. 어느 국가도 이런 파격적인 지원을 한 사례는 찾기 힘들다.
이 때 두 가지 목표가 함께 설정됐다. 하나는 인문학의 진흥을 개인 차원이 아닌 연구소 차원의 지원을 통해 달성하겠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인문학의 학문후속세대를 장기적으로 양성하겠다는 것이었다.
학문의 자율성이라는 측면에서 보면 개인의 자유로운 연구가 더욱 바람직해 보이지만, 현대 사회의 복잡다단한 현실을 고려하면 집단연구가 더욱 효과적일 수 있고, 집단 연구를 통해 집단 지성을 형성하는 것이 더욱 바람직할 수가 있다. 인문한국은 후자의 길을 택한 셈이다. 또한 연구에 종사하는 HK교수의 신분을 보장해 일생 동안 연구에 몰두할 수 있도록 설계한 것은 인문학 후속세대를 양성하기 위한 파격적인 배려였다고 할 수 있다.
인문한국 사업이 시작된 지 벌써 6년으로 접어들고 있다. 이 사업은 매년 연차평가를 하지만, 특히 3년마다 단계평가를 하게 돼 있다. 일찍 출발한 연구소들은 1차 단계평가를 받았고, 내년에는 2차 단계평가를 기다리고 있다. 1차 단계평가에서는 연구소가 갖춰야 할 체제를 중심으로 평가했고, 몇몇 연구소가 중도 탈락하는 진통을 겪기도 했다.
2차 단계평가에서는 업적을 중심으로 평가할 예정이다. 어떻게 양적 평가를 넘어 질적 평가의 객관성까지 확보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2단계 평가에서의 가장 큰 고민이다.
인문학의 성과란 사실 측정하기 힘들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그 동안의 HK사업단의 여러 연구 성과물들이 지속적으로 축적돼 꺼져가던 인문학의 불씨를 새로 지폈다는 평가는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그 근거로서 다음과 같은 사실들을 들 수 있다.
이제 우리 인문학도 근대 서구의 인문학을 단순히 이해하고 수용하는 추격자 단계를 넘어 우리 나름의 목소리가 담긴 이론과 성과를 세계인들에게 제시해야할 상황에 와있다. K-팝이나 드라마 중심의 한류가 인문학을 중심으로 한 ‘인문한류’로까지 발전해야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10년 후에는 적어도 세계적인 연구소 몇 개는 만들어 보자는 초심을 잃지 않고 전진을 계속한다면 인문한국이 이런 희망의 원천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한구 성균관대·철학
서울대에서 역사철학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철학연구회·한국분석철학회·한국철학회 회장 등을 지냈고, 2010년 8월부터 한국연구재단 인문사회연구본부장으로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