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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들의 풍경] 대안세계를 향한 21세기 지성의 탐색
[책들의 풍경] 대안세계를 향한 21세기 지성의 탐색
  • 최익현 기자
  • 승인 2000.12.22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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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화하는 시장 앞에서 어떻게 인간을 끌어안을 것인가

지금까지 인간의 세기에 있어서 가장 강력한 동인이 노동과 자본이었다는 사실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 자본의 이동은 세계경제(global economy)를 향해 발빠르게 스스로를 재구성하는 반면, 시간에 속박된 신체를 움직이면서 기능하는 노동은 점점 주변화할 뿐만 아니라 그 스스로 자본의 질서를 내면화하고 있다.

주변화되고 자본질서를 내면화하는 노동

영국 런던대 버크백 컬리지 명예교수인 에릭 홉스봄의 '노동 운동의 세기'를 중심에 둔 '노동의 세기'(에릭 홉스봄 외 지음/임지현 엮음, 삼인 刊)와 독일 브레멘대 교수인 홀거 하이데의 '노동사회에서 벗어나기'(강수돌 외 옮김, 박종철출판사 刊) 두 책은 이 점에서 매우 근원적인 문제제기를 하고 있다. '노동을 어떻게 끌어안을 것인가' 하는 물음. 홉스봄이나 하이데 교수의 시각 자체는 그렇게 새로울 것이 없으나, 워낙 문제의 심장을 제대로 겨누고 있는지라 '제2의 IMF' 운운하는 추문에 휩싸인 한국현실에서 본다면, 신중하게 귀를 열고 들어볼 필요가 있을 듯 하다.
'노동의 세기'는 역자들이 말한 것처럼 '노동 운동, 실패한 근대의 프로젝트인가?'라는 제목 아래 지난해 9월 오스트리아의 린츠에서 열린 '국제노동사학회'(ITH)의 제 35회 학술대회 발표문을 중심으로 편집한 내용. 그래서 책의 무게중심은 '노동에 대한 근대의 시각과 탈근대의 시각'에 쏠려 있고, 이것은 홉스봄의 글과 폴란드 출신 유대계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폴란드 바르샤바대 명예교수)의 '노동의 대두와 몰락'으로 대변된다. 이 공감의 자장을 따라가면, 우리는 한 순간 하이데의 매우 따분하게 보이긴 하지만, 굉장한 내파력을 지닌 '연대'와 마주치게 된다.
20세기에 노동운동과 함께 어떤 변화가 있었으며, 노동운동은 어떻게 발전했는가, 그리고 노동운동이 20세기 역사에서 수행한 역할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서 홉스봄은 노동의 세기를 점검한다. 그의 명석한 이성은 노동운동과 사회주의 노동운동을 분별하는 데서 빛난다. 홉스봄에 따르면, 노동운동은 임금노동자 계급이 보여 주는 특성으로 사회적 생산의 특정 단계에 대두된다. 이렇게 볼 때 노동 운동은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며 실질적으로 불가피한 사회 현상이지만, 사회주의는 하나의 '프로젝트', 즉 자본주의를 붕괴시키고 하나의 새로운 사회와 경제 체제로 대체하려는 의도이자 시도일 뿐이다. 이 양자는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지만, 동일한 것은 아니다. "1900년부터 마르크스주의 노동운동이 자본주의 주요국가들에서 체제와 전쟁상태가 아닌 사실상 '공존' 상황에 있게 되었다"는 그의 분석은 이러한 맥락 속에 놓여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노동 운동의 미래는? 홉스봄은 조심스러운 낙관론에 기대고 있다. 고용주와 피고용자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계급투쟁은 계속될 것이며, 상반되는 이해관계를 가진 사회집단들의 정치가 존재하며, 무엇보다 세계경제 앞에서 국민국가가 후퇴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국가가 소멸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노동 운동은 계속될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렇다고 이 소망스러운 낙관론의 지평을 확대하기는 어려운데, 왜냐하면 거기에는 두 가지 위험이 노동운동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 지도자들이 시장 이데올로기 앞에 무릎을 꿇는 것, 그리고 시민의 탈정치화라는 위험이 그것이다.
바우만 교수의 분석은 한 마디로 이렇다. '무거운 근대성'(자본과 노동의 동거)에서 '가벼운 근대성'(유연한 자본 중심)의 시대로 '대전환'이 진행됐다는 것, 노동과 자본의 상호의존성은 깨졌고, 장기적 심성을 대체하고 새로운 '단기적' 심성이 들어섰으며, 결국 노동의 생애에는 "한 사람의 생애와 미래의 전망을 쑥밭으로 만들 수 있는 끔찍한 재앙이 담겨 있"는 불확실성이 증대됐다는 것이다. 이 불확실성은 '극심하게 개별화하는 힘'이며, 통합 대신 분열한다. 상호의존성이 살아 있는 곳은 노동과 자본이 아니라, 자본과 고객/구매자/소비자 라인이다. 그러나 바우만 역시 이러한 분석이 '별반 합리적인 시사점'을 던지지 못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대량 생산 공장에 모여든 노동자들이 자기 노동력을 파는 조건들을 좀더 인간적이고 보람있는 것으로 만들기 위해 대열을 짓고, 또 노동 운동의 이론가와 실천가들이 이러한 노동자들의 연대 속에서" 삶의 결과, 사회적 환경이 급격하게 변화해 왔다는 사실을 강조하게 된다. 다시 한번 '연대'의 의미가 부각되는 셈이다.
홀거 하이데 교수의 '노동사회에서 벗어나기'에 실린 글들은 이미 개별적으로 국내에 소개된 바 있다. 하이데의 입론에서 가장 눈에 띠는 대목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사람들이 자본주의 체제의 작동방식에 걸맞게 기능적으로 행위하게 되었는가?"라는 점이다. 새로 소개된 '한국 자본주의 형성의 주체적 조건'이 이 문제를 집요하게 따지고 있다.

우리사회에서 발견되는 '노동중독'

"자본이 계속 '살 수 있게' 하는 항상 새로운 에너지는 어디에서 오는가? 자본이 움직일 수 있는 에너지를 계속 제공하는 것은 바로 사회적으로 행해지는 인간 자신이다."라는 명제 속에 하이데의 중요한 생각이 압축돼 있다. "우리가 파괴적으로 규명한 자본을 우리 외부에 존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이를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 기존의 수많은 해석들을 극복할 수 있"는 지점은 이 무서운 '적대성'이 바로 우리 인간 '내부'에서 자라나고 있기 때문이라는 그의 통찰은 탁견이다. 적대성이 내부에서 숨쉴 때 노동하는 인간은 밖과 안에서 '중독증'을 경험하게 되며, 이렇게 해서, 자본주의시스템은 자신을 거듭 재생산하게 된다. 여기서 깊이를 알 수 없는 끝모를 '피로감'이 사회 전체에 스며들어 자연과 인간을 행복하게 잇는 고리를 점점 상실하게 만든다('노동 중독증에 대한 이론적 고찰').
실직자가 경제적 이유때문에서가 아니라, 회사(자본)로부터 버림받았다는 두려움과 공포 때문에 자기 정체성의 심각한 분열증을 경험하고 이 때문에 사회적으로 좌절하는 사례를 빈번하게 경험하고 있는 오늘 우리 사회에서 '노동중독'을 발견하기란 어렵지 않다. 이점에서 하이데가 "잃어버린 영성을 다시금 회복하는 장기적 과정"으로서 노동중독증 치유를 제시한 것은, 주체성의 형성과 연대, 탈영성화의 극복을 가능하게 하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전제 조건 확보를 강조하는 것과 더불어 음미할 만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
최익현 기자 ihchoi@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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