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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_ 명예교수 체질론
원로칼럼_ 명예교수 체질론
  •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물리학
  • 승인 2012.04.24 17: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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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물리학
산다는 것, 더구나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참 경탄할 일이다. 내가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닌데, 어느 날 문득 생각해보니 이렇게 놀라운 삶의 한가운데에 내가 놓여있다는 것, 이것을 경탄이란 말 이외에 어떻게 표현해야 할 것인가. 물론 여기에도 끝이 있다. 하지만 이 제한된 삶이나마 값지게 채울 수 있다면 이처럼 복된 일이 없을 것이다.

한데 삶이 가진 한 가지 특성은 지난 일을 되돌릴 수 없다는 점이다. 그래서 주어진 삶은 언제나 남아있는 삶이 된다. 더욱 섭섭한 일은 이것이 그리 화려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일생 학문을 대해 온 교수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명예교수가 그리 ‘명예’롭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다. 신체 기능이 하향곡선을 그리고 있는 마당에 미래의 기대치가 언제고 높을 수만은 없다.

그래서 우리는 고민하게 된다. 끝까지, 아니 끝으로 갈수록 더 보람되고 알차게 살 수는 없을까. 삶이 하나의 예술 작품이라면 그 종결부문을 가장 멋지게 이뤄낼 수는 없을까. 나는 이것이 가능하리라 본다. 오직 한 가지, 이를 위한 체질을 가지고 있다면. 사람은 체질을 타고나기도 하지만 나이가 들어갈수록 자기 체질을 자기가 만들어 간다.

교수들은 일단 교수 체질에 순응하고 있다. 교수들이 교수 체질에 맞지 않으면 건강을 상실하거나 혹은 딴전을 펴게 된다. 요절하는 사람 혹은 다른 일로 뛰쳐나가는 사람들은 일단 교수 체질에 적합하지 않은 경우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교수 체질에 잘 순응한 사람이 명예교수 체질에도 잘 맞는다고 할 수는 없다. 명예교수가 되고도 여전히 교수와 똑같이 뛰어야 하는 사람은 교단을 물러나 ‘할일 없는’ 시간을 배겨내기 어려울 것이다. 정년이 되기도 전에 정년으로 물러나면 어쩌나 걱정하는 사람이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한다.

그러니까 명예교수 체질에 가까운 사람들은 정년 무렵이 되면 정년이 기꺼이 기다려지는, 그리고 정년퇴임을 하면 고향에 돌아온 듯 느긋한 마음을 갖는, 바로 이런 사람들이다. 하지만 진정 명예교수 체질이 되기 위해서는 여기에 한 가지를 더 보태야 한다. 곧 자기 학문을 진정으로 즐기는 사람이다. 이제야말로 내가 하고 싶은 학문을 아무런 제재도 받지 않고 마음껏 할 수 있구나 하고 마치도 물고기가 물을 만난 듯 학문의 세계에 마음껏 뛰어드는, 바로 그런 사람이다.

왜 굳이 학문인가. 학문이 아니어도 좋다. 그가 일생 공들여 연마한 일을 이어나갈 수만 있으면 된다. 이제 거기서 한 걸음 더 깊이 들어가 남들은 하지 못하던 새로운 경지를 넘나드는 것, 이것이 가능하면 된다. 여기에서 어떤 성과를 내느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다. 평생 그러한 것 때문에 얼마나 시달려 왔는가. 그러니 이제라도 성과에 무관하게 마음껏 몰입하는 것, 그러다가 성과가 나오면 그것은 그것대로 좋은 일이지만, 여기에 구애됨 없이 즐길 수 있는 것, 이것이 마지막 생애가 누릴 최상의 경지 아니겠는가.

그런데, 그게 왜 굳이 체질인가. 오히려 마음의 자세라든가 심정적 기질이라고 보는 것이 더 적절하지 않은가. 그렇기도 하지만 굳이 체질이라 말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결국은 몸의 바탕에 깊이 연루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마음의 자세를 고쳐먹고 싶어도, 심정적 기질을 바꿔보고 싶어도, 이들이 체질 깊숙이 각인되어 있지 않고는 모두 공염불이다.

그렇기에 이런 체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공을 들여야 한다. 내 생각에는 적어도 몇 십 년의 준비가 필요하리라 본다.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소의 관심, 곧 몸과 마음의 쓰임새에 무리가 없도록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약간의 좋은 습관을 붙이는 것이 좋다. 지난 시기의 삶을 되돌릴 수는 없지만 지난 시기에 마련한 체질은 남은 삶을 빛내는 데에 큰 도움을 준다.

장회익 서울대 명예교수·물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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