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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해석 앞에서 ‘약동’하거나 ‘요동’치거나
새로운 해석 앞에서 ‘약동’하거나 ‘요동’치거나
  • 김월회 서울대·중어중문학과
  • 승인 2012.04.24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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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인문교육과 고전읽기 ④ 고전교육은 집단을 뒤흔들었나(동양편)

사고실험을 해보자. A학원이 대학입시 시장은 기본, 국가고시 시장까지 석권하고 있었다고 치자. 그런데 어느 날 B학원이 교과서에 대한 참신한 해석과 첨단 교수법을 들고 불쑥 나타나 돌풍을 일으켰다. 이때 어떤 일이 뒤이어 벌어질까. 모르긴 해도 참신한 해석과 첨단 교수법은 A학원에게는 ‘요동’을, B학원에게는 ‘약동’을 선사했을 것이다.

신흥 학원의 출현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했을 집단은 수험생일 것이다. 그들은 시험에 합격하는 데 유리하다고 판단되는 학원을 선택한다. 다시 말해 A학원에 충성하기 위해 그 학원을 다닌 게 아니라 자신의 목표 달성에 가장 적합했기에 다녔을 따름이다. 그러니 B학원이 합격에 더욱 유리하다면 주저 않고 그쪽으로 옮기는 것은 인지상정, 아마 A학원의 시장점유율도 급속도로 하락했을 것이다.

금문경 역습한 고문경의 발견

이제 고전으로 돌아가 보자. 고전교육이 단지 교양이나 학술의 문제만이 아니라 권력의 문제와 직결돼 있는 곳이 있다고 하자. 그곳에서 고전을 참신하게 해석해 새로운 지식과 정책을 생산해낸다면, 게다가 지식대중의 호응까지 가히 선풍적이라고 한다면 어느 집단이 크게 요동칠까.

陸賈는 진언할 때마다 『詩經』과 『書經』을 언급했다. 그러자 漢 高祖가 그를 책망했다. “나는 말 위에서 살다시피 하며 천하를 얻었는데 어찌 『詩經』과 『書經』을 받들겠는가!” 그러자 육가가 아뢰었다. “말 위에서 살다시피 하며 천하를 얻을 수는 있어도 어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 『史記』 「酈生陸賈列傳」

漢을 건국한 劉邦은 ‘流氓’ 그러니까 깡패 출신이다. 그래서 문제라는 뜻이 아니다. 사회의 밑바닥에서 황제의 자리에까지 올랐으니 예사로운 사람은 분명 아니었다. 다만 역사를 찬찬히 익힐 기회가 없었던지라 천하의 통치에는 文과 武, 이 둘의 조화로운 날개짓이 필요하다는 섭리를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니 제국의 통치에 고전이 어떤 가치를 지니는지 알리 만무했다.

그는 입만 떼면 『시경』, 『서경』을 운운하는 육가에게 말 위에서 천하를 얻은 자신에게 어찌 『시경』, 『서경』을 받들라고 하냐며 힐난했던 것이다. 그러다 육가가, 말 위에서 천하를 얻는 것이 가능하다고 해서 거기서 천하를 다스리는 것이 가당키나 하겠냐고 되받아치자 왜 그가 틈만 나면 고전을 언급했는지 그 의도를 금방 알아챘던 것이다. 그에게 제국 통치의 기틀로 삼을 만한 대계를 물었고, 이에 육가는 『新語』라는 글을 올려 유가의 이념을 바탕으로 천하를 통치하는 방책을 제시했다.

채택된다면 오경 등 유가의 고전이 제국의 기틀을 주조하는 원천으로 거듭나게 되는 상황이었다. 당시는 도가와 법가가 결합된 黃老學이 황실에서 신봉되고, 진시황 때 제정된 ‘挾書律(책을 들고 다니면 처벌한다)’이 시행되는 등 시대의 풍기는 여전히 反지성적이었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유가의 고전을 익힌 이들이 제국의 통치에 대거 참여할 길이 열렸다는 소식은 과연 어느 집단을 더 술렁이게 했을까.

언뜻 헤아리면 드디어 정계 진출의 길이 열린 유생 집단이 가장 들썩거렸을 듯싶다. 그러나 역사는 그들보다는 ‘말 위에서 천하를 차지한’ 이들 곧 기득권을 쥔 세력이 더 민감하고도 재게 반응했다고 일러준다. 어쩌면 이런 반응 양상이 더 다반사였을지도 모른다. 한대의 사례 하나를 더 들어보도록 하자.

육가의 방책 덕분이었는지, 2대 황제인 혜제는 협서율을 폐지했고 5대 황제인 무제는 조정에 오경박사를 두는 등 유가이념을 제국통치의 최고이념으로 받들었다. 이로써 성인이 전수한 지성을 기반으로 정사를 수행한다는 유가의 지향이 확고한 제도적 기반을 확보하게 됐다. 그런데 당시 유가들이 신봉했던 경전은 훗날 ‘今文經’이라 불렸던 텍스트였다.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대부분의 책들이 소멸되자, 유가들은 구전되던 경전을 받아 적는 방식으로 경전을 되살렸다. 이때 사용된 글꼴은 당연히 자신들이 사용하던 당대의 서체였다. 이를 ‘당시에 사용되는 문자(今文)’로 기록한 경전이라는 뜻에서 금문경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기원전 1세기 무렵, 당시뿐 아니라 이후 2천여 년 간의 중국지성사 무대를 뒤흔든 사건이 발생했다. 공자의 고향을 다스리던 제후가 자기 집 확장공사를 위해 공자 생가의 일부를 허물었는데, 그 벽속에서 다량의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분서갱유의 화를 피하기 위해 공자의 후손들이 책을 벽에 넣고 봉해두었던 것으로 추정됐다. 책에 쓰인 글꼴이 분서갱유 이전 시대에 사용되던 古體였기 때문이었다.

그 책들은 수습돼 조정으로 이송됐다. 이로써 금문경보다 오래전에 만들어진 경전이 세상에 알려지게 됐고, 사람들은 이를 옛 글꼴로 기록된 경전이라는 뜻에서 ‘古文經’이라고 불렀다.

고문경의 출현은 금문경학자, 그러니까 금문경을 기반으로 학술과 정사를 움켜쥐고 있던 이들에겐 커다란 도전이었다. 둘 사이에 존재하는 문자의 이동이라든지 분량의 차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들은 전승과정에서 발생된 변형으로 치부될 수도 있기에 그다지 큰 문제가 아니었다. 큰 문제는 제도적 차원에서 구현된 학술과 정치의 일체화라는 현실 자체에 도사리고 있었다.

고문경이나 금문경은 전승과정에서 발생한 이본일 따름이지 그 근원은 엄연히 동일했다. 이런 판국에서, 만약 일군의 학자들이 고문경을 기반으로 새로운 견해를 제시하게 된다면, 나아가 이를 기반으로 새로운 통치의 방책을 듣고 나온다면….

금문경학자의 입장에선 권력을 분점하거나 최악의 경우 놓아야 하는 상황에 직면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기원을 전후한 시기에 王莽이란 이는 劉歆 같은 고문경학자의 도움 아래 고문경학의 이름으로 한을 멸하고 新이라는 새 왕조를 개창하기도 했다. 물론 몇 년 못 가서 유방의 후예에 의해 진압됐지만 말이다. 학술과 정치가 고도로 일체화된 곳에서는 이처럼 고전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그 해석을 익히는 집단보다는 현실의 이해관계를 쥐고 있는 집단을 요동치게 만들곤 했다.

전통에 대한 도전과 저항

남송시대 朱熹가 四書라는 새로운 경전의 체계를 짜들고 나오자 오경으로 대변되는 기존의 경전체계가 흔들렸고 이에 조정은 가차 없이 주희의 학문(朱子學)을 ‘삿된 학문(僞學)’으로 규정해 금지시켰다. 주희와 그의 문도들이 서원이란 공간적 거점, 講學이란 새로운 교수법을 발판삼아, 공자와 맹자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차분하고도 활기차게 사방으로 전한 데 비해 조정은 도에 넘는 호들갑을 떤 셈이었다.

주자학이 세상에 선뵀을 때만이 아니었다. 양명학자인 李贄가 사서오경을 근거로 혁신적인 사유를 전개하자 조정은 부랴부랴 그의 책을 불살랐고, 일흔을 훌쩍 넘긴 노학자를 잡아들여 감옥에 가두었다. 조선에선 양명학이 신분질서와 윤리강상을 어지럽힌다면서 사문난적의 딱지를 붙여 접근 자체를 원천봉쇄했다.

물론 그와는 무관하게 왕양명의 새로운 경전해석과 교육은 명 중엽 이후 사회적 주체로 급성장한 상인계층과 적잖은 儒商(상업을 생업으로 삼았던 유생)들에게 널리 지지되며 새로운 삶의 방식과 문화를 또 다양한 가치와 역사경험을 창출해냈다. 새로운 고전 해석과 교육이 시도되는 장은 이처럼 생동하는 활력으로 약동했지만, 기득권의 장은 호들갑을 떠느라 요동치기에 여념이 없었던 게다. 둘 다 ‘움직였지만(動)’ 그 양상은 꽤나 달랐던 셈이다.

김월회 서울대·중어중문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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