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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주의의 희화적 변화를 보여주는 그 곳
민족주의의 희화적 변화를 보여주는 그 곳
  • 김희연 기자
  • 승인 2012.04.23 14: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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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현대 한국을 만든 40곳] 왜 ‘장충단’을 추천했나

근현대 한국을 만든 곳으로 장충단 공원을 추천한 역사학자는 윤해동 한양대 교수(한국근대사)와 이계형 국민대 연구원(한국근대사)이다. 장충단 공원에서 무엇을 봤을까. 윤 교수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윤 교수는 장충단 공원이 ‘짓궂은 운명’이라며 탄식한다. “조선 왕조에 충성한 사람을 제사 지냈다가 일본 근대화를 주도했던 일본의 영웅을 제사 지냈다가 대한민국에 와서 외국의 국빈을 모시는 자리를 만들어 놨으니” 역설적이 아닐 수 없다는 것.

그래서 윤 교수는 장충단 공원을 민족주의의 희화적 변화를 보여주는 장소라고 평한다. 을미사변 때 죽은 군인들을 제사 지낸 장충단. 그리고 그 자리에 세워진 박문사. 해방 후 식민주의의 상징적 인물 이토 히로부미를 제사지내는 박문사는 바로 헐렸다. “조선 사람들이 일제에 한이 맺혀서 그런지 해방 되자마자 전국의 신사를 다 때려 부쉈거든요. 그래서 지금 신사가 남아있는 게 많이 없어요.” 박문사가 부서진 자리에는 외국 국빈을 대접하는 영빈관이 세워졌다.

영빈관 자리는 삼성에 불하돼 1979년 신라호텔이 세워졌다. “경제가 성장하고 국빈을 모실만한 장소가 필요하니까 ‘국빈을 모실 정도로’ 훌륭한 호텔을 만들라”는 이유였다. 옛 영빈관 건물은 아직도 신라호텔 옆에 흔적처럼 남아있다. 조선왕조에 대한 전근대적 충성에서 근대적 애국심으로, 또 그것이 다시 자본주의의 맥락으로 넘어간 것이다.

한편 장충체육관, 국립극장의 건설 등으로 축소되긴 했지만 50~60년대 장충단 공원은 서울 시민들의 가장 중요한 휴식처 중 하나로 기능했다. 그러던 장충단 공원은 70년대 중ㆍ후반 강남 지역이 개발되고 확장되면서 중요성이 줄었다. “옛날에는 여러 중요한 역할을 했죠. 60~70년대에는 대통령 유세도 많이 해서 백만명이 운집하기도 하고 그랬어요. 서울 시민들의 광장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죠.”

민족주의와 애국심과 자본주의의 요란한 상징물들이 교차하는 이 곳. 어떤 시대에는 죽음을 통해 전근대와 근대를 넘나들었고 또 어떤 시대에는 서울 시민들에게 공공의 공간이자 휴식의 공간이기도 했던 장충단 공원. 소란스러운 역사의 한복판에 자리했던 이 공간은 장충단이 세워진 지 112년이 지난 지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한적하고 초라해져가고 있다.

김희연 기자 gomin@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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