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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단적 평가 끊임없이 강요할 때 대학은 공민적 임무 수행할 수 없어”
“독단적 평가 끊임없이 강요할 때 대학은 공민적 임무 수행할 수 없어”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2.04.17 14:48
  • 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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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와 퀴세 프랑스 파리 10대학·미국문명학

창간 20주년을 맞아 <교수신문>은 ‘세계의 창’을 신설, 첫 번째 주인공으로 프랑수와 퀴세 교수(44세)와 이메일 인터뷰를 했다. ‘세계의 창’은 동시대의 다양한 사고 실험을 모색하는 해외 지성을 조명하는 기획이다. 젊고 낯선 프랑스 교수가 한국에 소개된 것은 지난 1월 국내에 출간된『루이비통이 된 푸코?』를 통해서다. 퀴세 교수는 미국에서의 프랑스 담론 수용과 재해석의 긴 역사를 추적하며 대담하게‘미국 지성의 사회사’지형도를 그려냈다. 퀴세 교수가 펼쳐 놓은 프랑스 이론의 미국적‘발명’이 한국에서는 독특한 ‘한국적’ 방식으로 전개됐기에, 한국적 이론 수용의 역사를 정리하는 의미로 퀴세 교수에게 질문할 필요가 있었다. 이론이란 무엇인가, 이문화로 여행하는 이론의 수용과 곡해의 과정은 이론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이번 인터뷰에서 퀴세 교수는 지난해 방한해 한국 교수들과 토의한 기억을 들춰내며 대학을 배회하는 각종 담론에서부터 신자유주의까지 종횡무진 답변했다.

프랑수와 퀴세 (1969~) 파리 10대학(낭테르 대학교) 미국 문명학 교수. 생-클루 고등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프랑스국립과학연구소와 파리정치대학교에서 연구하고 강의했다. 주요 저서로『反68담론: 68을 죽이고 파괴한 자들이 그 계승자들에게 말하지 않는 이야기』,『 지난 10년, 1980년대라는 거대한 악몽』,『 퀴어 비평: 동성애자-독자가 벗겨낸 프랑스 문학』등이 있다.

△ 현재 당신이 관심을 갖고 있는 화두나 사회적 이슈들이 있습니까? 있다면 무엇인지 공유하길 원합니다.

“최근 제가 관심이 있는 세 가지-이들은 서로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만-에 대해 언급하고자 합니다. 우선 지성적이고 지정학적 영역입니다. ‘프랑스 이론’의 최초 유행 30년 후 미국과 프랑스 사이의 지성적 관계에 대한 균형회복인거죠. 프랑스 사상을 통해 지적인 자양분을 획득했던 미국의 위대한 비판적 지성들의 글이 마침내 프랑스에 번역되고 발견됐습니다. 이제 그들은 ‘추상적 보편주의’ 나 ‘단일’한 형태(혹은 반공동체적)의 사회적 비판이라는 어떤 프랑스식의 거만함이나, 프랑스식 확실성을 뒤흔들 수 있습니다. 이런 회귀효과-저는 프레드릭 제임슨이나 웬디 브라운 같은 사람들의 책을 프랑스어로 번역하고 출간하는 편집자로 여기 참여했습니다-는 프랑스에서 중대한 쟁점들입니다. 우리의 지적인 공간의 장벽을 없애기 위해서, 자신만만한 공화주의나 ‘미완의’ 종속상태에서 벗어나기처럼 프랑스 현대사의 수많은 ‘블랙박스들’을 여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서입니다.

두 번째 것은 좀 더 개인적이고 문학적인 것입니다. 문학의 방식은 평론의 형식보다 정치적이고 실존적이며 세대 고유의 문제제기를 더 잘 연장할 수 있습니다. 더 이상 말하지 않겠습니다. 정치적 유토피아와 친선에 사로잡혀 있는 것에 관한 제 첫 소설(『세계의 쇠퇴로부터의 안전』, P.O.L출판사 8월말 출간예정)이 이번 가을 출간됩니다.

마르크스-반마르크스 탈피한 마르크스 사유 가능

그리고 세 번째 것은 현실과 더 직접적으로 맞닿아 있습니다. 개인의 채무처럼 국가 부채의 방법은 현재의 위기와 더불어 감시의 기술이 됐고, 육체와 정신을 제어하는 방식이 됐으며, 재정, 통화 정보와 무관하게 권위적인 정치, 윤리 담론이 됐습니다. 그리스와 그곳의 지배적인 담론들, 이 문제에 대한 유럽국가들 운영의 취약한 주변부-프랑스 대선이 입증하는 것 같은(적어도 두 대선후보에 대한 프로그램), 어떤 의미에서의 그들의 정치적인 회피를 보세요. 이제 채무는, 푸코의 관심을 무척이나 끌게 했을 예속상태의 장치로 기능하면서 오늘날 국민에게 국민의 죽음과 정치적 의도를 포기하게 하는 설득 수단이 됐습니다.”

△ 바디우와 랑시에르가 최근 한국에서도 많이 번역 논의되고 있습니다. 주로 민주주의의 문제, 급진적 좌파 주체의 문제에서 많이 인용됩니다.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문제가 많은 갈등을 낳았던 한국이니만큼 이들 담론이 가진 급진성이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새로운 담론적 출구가 되었다고 할까요. 또한 지젝의 인기도 이들 두 철학자를 한국인들에게 소개하는 데 기여 했습니다. 프랑스 학계에서 바디우, 랑시에르의 논의는 한국에서만큼 적극적인지 궁금합니다.

“물론입니다. 바디우와 랑시에르는 비판적이고 엄정한 좌파 사상의 마지막 생존자(그리고 유일하게 알려진)로서 프랑스에서도 중요한 사상가들입니다. 그들은 지적 보수주의, 수십 년의‘연옥’시대 이후 최근에야 이런 재평가를 받았지요. 하지만 프랑스에서 그들은 자신들 저작의 측면이나 차원에 따라 다르게 위치합니다. 유감입니다만, 바디우는 형이상학자 같은 반 사르코지파의 비방 작가로, 또 미학이나 윤리 이론가 같은 마오이스트 수필가로 가장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랑시에르는 그의 논쟁적인 에세이나 정치의 혁신적인 재개념화로 유명한데, 역시 유감스럽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프랑스에서 비판적인 좌파의 영역에서—프랑스에서 지금 풍요롭고 다양하고, 그들과 계승자, 후대에 귀착하지 않는—가장 명백한 저명인사이기도 합니다.

지젝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매혹시키고 유혹합니다. 그는 다른 곳에서와 마찬가지로 프랑스에서도 즐기고 빛을 발합니다. 어쨌든 프랑스에서 적어도 몇몇 분야에서 이 세 이름의 인지도는 특히 그것이 이제는 가능하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아마도 프랑스 이론의 때늦은 상속 덕분에 정통 공산주의자나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지 않고도 마르크스로부터 차용하거나 그의 계보 안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이지요. 달리 말하자면, 프랑스 지성계를 오랫동안 지배해왔던 독선적인 마르크스주의자와 악의에 찬 반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의 엄격한 양자택일을 전면 거부하면서도 독창적인 개념을 창조해내고 사유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지요. 그건 오히려 좋은 징조입니다. “

△ 한국에서도 푸코, 들뢰즈, 데리다 등은 인문학계 전반에서 90년대 이후 현재까지 큰 영향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프랑스 이론의 직접 번역을 통하기도 했지만, 한국 교수의 다수가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점에서 볼 때 미국을 통한 프랑스 이론의 수입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다만 미국과 한국의 차이점 하나는, 한국의 경우 이 이론가들의 번역어들에 대한 논쟁이 이론 자체의 현실 적용성/설명성에 관한 논의보다 많다는 점입니다. 하나의 사상, 이론이 정확하고 적합하게 다른 문화적 토양에 뿌리내리려면 어떤 노력과 관심이 필요할까요? ‘수입담론의 그늘’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보편성과 특수성이 상호 공존하는 하나의 이론으로 수용되는 길 말입니다.

“저는 한국의 상황을 전혀 모릅니다. 하지만 제가 다른 나라에서 관찰할 수 있었던 것은 탈맥락화에 만족한다는 결과입니다. 어떤 분야(철학), 어떤 용도(해석학적이거나 사회운동가를 위한) 그리고 어떤 배경(68년도)의 프랑스에서 온 사상가들은, 다른 나라에서 생존하기 위해서, 그런 배경에서 벗어나야만 했고, 탈맥락화해야만 했으며 그리고 난 뒤 상이한 사회와 용도를 향해 다른 과목(문학이나 예술 같은)으로 옮겨가야만 했었습니다. 중재자의 전략과 상황에 따라 빨리 이동이 가능하기도 했고, 번역된 책들이 광범위하게 퍼져나감에 따라 천천히 이동하기도 했습니다.

저는 한국의 다른 분야들에서 다공성과 방진성을 잘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제가 여기서 봤을 땐—아주 멀리서 봤다는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두 영역이 실제 상황에서 프랑스 이론의 유용한 행사가 가능할 수 있다고 봅니다. 어떤 면에서는 이미 이 두 영역이 이미 행해지고 있다고도 봅니다. 노동조합의 투쟁부터 대학의 후기마르크스주의까지 반자본주의자들의 전투적 영역이 있고, 이미지의 양면성과 새로운 기술이 공존하는 근심스러운 현대 예술의 영역이 있습니다. 거대담론을 세우는 것만이 아닌, 그런 이론들로부터 특별한 작용과 행사를 부과하기 위한 매우 활발하고 독립적인 두 영역 말입니다.”

△ 당신은『루이비통이 된 푸코?』에서 이론이 생명력을 가지는 것은 그 탄생이 아니라 여행에 있다는 견해를 보입니다. 동시대에도 국가마다 다르게 수용되는 이론의 정체성을 생각해 볼 만합니다. 실제로 이론의 창안자들은 곡해돼버린 자신의 이론을 어떻게 생각할까요? 이론은 과연 만들어질 때의 정체성보다는 시대의 부름을 받고 끊임없이 재생되는 것입니까?

“물론, 적어도 안목을 잃지 않고, 원래 이론과 텍스트의 근본으로 돌아갈 줄 알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동, 수용의 효과, 늘어나는 오해를 강조하는 의미에서, 저는 특별히 반대 현상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길 원했습니다. 이동의 효과 덕분에, 혹은 원래 주장에 대한 첫 수신자가 아니었던 사람들의 발명품 덕분에 가능했던 근본 명제들에 대한 쇄신 혹은 확장인거죠. 다른 한편으로 시대에서처럼 공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푸코나 들뢰즈에 대해 다른 문화권들이 하는 것을 보면 내게 또 다른 시대, 우리의 시대(적어도 20년 정도 그들 이후)도 다른 의미와 용도들을 재발견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그러니까 異文化간의 이동뿐 아니라 일시적 혹은 역사적인 이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논리로만 간다면, 미국인들이 인류학 독자들에게 권토중래할 때처럼(텍스트를 읽는 대신에), 또는 예술가들이 유리된 단편을 인용할 때처럼, 우리는 실제로 이 저작들의 첫 번째 정합성과 텍스트들의 자의, 정확한 전후관계를 잊어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그들의 이름은 물신화되고, 숭배의 기준이 된 반면에,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알기 위해서 그들의 텍스트로의 복귀가 필요합니다.”

△ 지난 번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한국 학자들과 토론한 것으로 압니다. 피상적이겠지만, 한국과 한국 학자들에 대한 당신의 느낌은 어땠습니까?

“저는 세 가지 점에서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우선, 학생 운동사와 사회운동가들의 투쟁사에 대한 종합평가를 이끌어내기 위해서, 그리고 위 작가들과 유사성이 없는 두 성가신 이웃—중국과 일본이겠죠—과 관련해 자신의 위치를 정하기 위해서, 아마도 유럽의 포스트마르크
스주의의 영향—특히 바디우와 아감벤이 여기 포함 됩니다—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으로 미국과는 반대로 대학 안에서 남한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관심사에 직면한 반향에 뜻밖의 즐거움을 맛봤습니다. 조선소의 한 파업노동자에 대한 연대 투쟁의 방식이나 서울시의 좌파 시장 선거가 지금 이곳에서 참여대학들에 의해 즉시 언급되고, 논의되며, 동원되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마지막 세 번째로는, 두 개의 한국, 분단, 통일에 대한 아직도 서로 먼 관점의 중요성이라고 확증할 수 있었습니다. 유럽에서 우리가 듣던 케케묵은 문구들과는 너무나 먼, 대학들이 제게 말했던 것들에 저는 심취했습니다. 저는 분단이 야기한 고통과 화해를 모색하는 모든 이의 주목할 만한 창의성을 동시에 느꼈습니다. 적어도 분단을 강화시키고자하는 지배적인 담론들에 맞서는 창의성이었죠. 북한은 남한 대학 내에서 중대하고, 지성적이며 정치적이고 감정적이며 이론적인 문제입니다. 저는 그것들을 즐겼습니다.”

프랑스 이론, 생존을 위해 탈맥락화로 이동

△ 한국은 미국의 신자유주의(FTA체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서 큰 사회적 혼란을 겪고 있습니다. 오히려 미국에서는 신자유주의의 개혁 이야기가 나오는 데 반해 한국에서는 신자유주의 반대를 이야기하는 게‘좌파’와 연결되면서 공격대상이 되곤 합니다. 물론 이것은 한국만의 문제는 아닐 것이고, 신자유주의 세계화 이후 세계 전체, 특히 무역에 의존하는 약소국들의 문제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현재적인 문제에 대해 최근 프랑스 이론가들은 어떤 문제의식으로 접근하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비록 한국에 다국적 기업들도 있고, 한국이 위기의 유럽보다 신자유주의에 우호적인 수출능력을 가졌다고 해도 워싱턴, 브뤼셀, 서울에서 열린 세계무역기구에서 주도적인 미디어와 대기업의 이사회를 통해 논의된 지배적이었던 신자유주의에 대한 재검토는, 현재의 위기에 의해 드러난 증거들에도 불구하고, 오늘날에도 역시나 어려운 문제입니다. 우리는 비판적 지성들이나 혹은 勞使의 이런 독단을 비난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나라들의 일반적인 정치노선을 수정한다거나 선거에 부담을 주게 할 수는 결코 없습니다. 그건 말하자면 정신분열증적인 상황인 겁니다. 지성인들이나 사회운동가들의 영역에서 이 고통들과 사회적인 문제들에 대한 과도한 인식인거죠. 하지만 대중 미디어와 결정권 층의 순진한 합의이기도 합니다. 민영화의 효과에 대한 합의이며, 복지국가의 위험들, 자유무역과 긴축 신조에 대한 합의입니다.

어떤 맥락에서 보면, 변화는 차라리 영토에 미치는 힘과 관련 있거나, 유명한‘객관적 상황’(레닌이 말했듯이)에 따른 그들의 변화와 관련 있습니다. 몇몇 국가의 독재로 시선을 돌리면 아랍의 봄 혁명가들의 약속에 대한 배신, 신자유주의의 강화, 주목해야 할 국가들(오늘의 스페인, 내일의 이탈리아, 그 이후의 프랑스나 독일)에서 그리스 모델에 관한 국민들의 불안정화는, 예정보다 일찍이긴 하지만, 길거리에서나 사회적인 투쟁에서 여전히 상당히 추상적인 이 논쟁을 잘 이동시킬 수 있습니다. 바로 그 순간, 신자유주의의 비판은 더 이상 대학만의 좋은 논제가 되지 않을 것이고, 모든 국민들을 위한 삶과 죽음의 문제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지도 모릅니다.”

△ 한국 사회에서‘교수’에게는 높은 도덕성이 요구됩니다. 교수들은 연구, 강의뿐만 아니라‘대학제도’를 만드는데도 참여해야 했습니다. 대학제도를 만든다는 것은 사회구조를 만든다는 의미도 내포하고 있기에 매우 중요한 작업입니다. 하지만 한국 대학의 역사는 매우 짧습니다. 그래서 교수들의 작업에는 혼선도 많이 있습니다. 대학의 역사가 오랜 프랑스에서 교수의 지위는 어떤가요? 프랑스사회가 교수들에게 요청하는 도덕적 책무 같은 것이 있는가요?

“대학 교수의 역할에 대한 프랑스의 오래된 개념, 특히 과학적이고 교육적이면서도 체계적이고 도덕적(공민윤리, ‘국민’이란 의미에서)인 역할은‘볼로냐 프로세스’의 신자유주의적 모델로 시행된 대학의 체제 개편에 의해, 그리고 대학들이 이끌던 상황과 지위가 약화됨에 의해 현재 뒤죽박죽이 된 상태입니다. 우리가 프로그램과 규범들을 매년 바꿀 때, 모집을 그만하거나 마지막에 뽑은 사람들에 대한 압력을 행사할 때, 예산을 줄이고 모두에게 전 분야에서 끊임없는 평가의 독단을 강요할 때, 그 상황은 대학의 교육적이고 공민적인 임무를 수행하기에 이상적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는 프랑스 학생들 스스로가 그것들에 대해 고통 받고 있다고 믿습니다. 학생들은 공부를 하면서 선생님들의 이런 새로운 근심을 느낍니다. 학생들은 잘 교육받은 젊은이들의 파업, 종종 잘못 받아들여진 교육으로 인한 파업과 더불어, 자신들이 대학에서 하기 위해 온 것들을 때때로 더 이상 알지 못하기까지 합니다.”

△ 요즘 한국대학에서는 반값 등록금 문제가 화두입니다. 이는 대학생들이 교육에 대한 구체적 고민을 시작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교육’은 결국 미래사회를 구축하는 문제일 텐데, 당신이 고민하는‘교육’은 어떤 것인가요? 교수와 학생, 대학과 학생이 함께‘교육’의 내용을 협의할 수는 없을까요?

랑시에르의 저서『무지한 스승』의 논리와 몇몇 실험적인 시도(1970년대 프랑스 뱅센 지방이나 최근의 몇몇미국 캠퍼스)에 따르면, 저는 학생과 선생 사이에 훨씬 더 긴밀한 협력이 필요하고, 그들의 지적이고 정치적인 대등함과 불가결한 독립성을 주장할 많은 필요성이 있다고 봅니다. 그러나 개혁과 불안정화(앞에 답변들을 보세요)된 상황은 호의적이지 않습니다.

권력은 선생과 학생처럼 객관적인 동맹일수밖에 없는 서로를 때때로 대립하도록 분열시키고 강요할 줄 잘 알죠. 하지만 그 권력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위태로운 교육의 특혜라는 이름으로, 지성적인 경계란 이름이나, 저항의 이론적이고 실천적인 도구란 이름으로 말입니다. 그런 협동적, 상호적, 연대적인 교육이 오늘날 발전돼야만 할 것이고, 우리 사회에서 개인적으로도 우리 모두가 거기에 기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다음 학위나 인턴(학생의 경우), 다음 정부 계획이나 학과의 감축 계획(선생의 경우)에 대해 생각하기를 그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때때로, 저는 이런 종류의 경험은 개인적 혹은 협회적(비영리적인)인 영역 안에서 시도돼져야 할 거라 중얼거리기도 합니다. 정부가 아닌 외부 협력자나 재단으로부터의 도움을 받아서 말이죠. 등록금이 낮게 책정되도록 하기 위해서 그리고 비판적이고 자유롭고 배타적으로 전문화되지 않은 교육을 발전시킬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위에 밝힌 제 입장은,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나처럼 대학문제에서도 아직 모든 해답을 정부가 가진 나라인 프랑스에서 그리 인기 있는 것은 아닙니다. “

물신화된 이름 제대로 알려면 텍스트로의 복귀

△ 대학이 지식생산 공장으로 전락했다는 지적이 세계 곳곳에서 들립니다. <네이처>는 2011년 4월호에서「The PhD. factory」라고 대학을 명명하기까지 했습니다. 대학은 박사과정 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쳐야 할 지 사회적 합의가 필요합니다. 과연 대학은 어떤 지식을 습득하고, 새 길을 모색하며, 추구해야 하는 공간입니까?

“대학은 과도하게 세계화된 자본주의 안에 있는 시대착오적 잔재입니다. 동시에 대학은 공통적이며 궁극적인 목적을 가진 질문들을, 단기적인 사회균형과 경제안정을 걱정하지 않고 주저 없이 논의할 수 있는 마지막 공간입니다. 하지만 시대에 적절한 비판적 도구의 착상과 공유의 재발견이 가능하도록 대학이 전적으로 연구실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대학에 재량권을 주어야 하고, 미국의 버락 오바마와 중국의 후진타오가 하는 것처럼 사르코지의 프랑스에서 현대 대학의 진화 및 혁신의 일환으로 오늘날 행해지는 것들의 逆을 시행해야 합니다. 우리는 무언가를 할 수 있을 것이고, 해야만 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린 전혀 다른 방향으로 갈 것입니다. 물론 너무 늦은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저는 대학의 문제에 대한 이런 비관적인 견해를 끝내야할 의무가 있습니다. 만약 대학을 벗어난 사회의 완전한 변화가 역방향으로 대학 자체를 변모시키고, 세계적인 규모의 거대한 사회적 봉기라는 가정 안에서처럼 그 연대와 비판의 길 위에 대학을 다시 위치시키는 경우를 제외한다면 말이죠. 그러나 저는 희망적으로 생각하기가 두렵습니다. 감사합니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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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45 2015-05-08 08:40:15
나는못하는데백수 정신왔나갔다 결혼 하는우명인사보면 역사 청첩장 이야기결혼식이야기하고 순리데로앴으면했을지도 결혼하는것보다 사는거문제 삼포 오포세대
다른거시키라해도 싫다하니 역시선생 공무원어이서인가
왜하기싫어면나갈걸

2345 2014-12-22 23:15:34
자식이부모보다나아야
결혼 평생보호자 돌아가신지몇는됐는데 시험않돼고 혼나기나하고 나이진게없고
아버지동창분들자식들잘됐지
아버지선생엄마만났으결혼하면애들잘되겠지 엄마가도공생하셨지

2345 2014-12-22 23:11:27
형은그나마자치하숙했는데 난왜집에있었지 말뿐이다지나고나서후회참후지진후지다
나가서직장안정되면살거나결혼할려했지
아버지는 이동내떠나면굻어죽는다고하시니 하긴아버지나돈벌어사셨으니까
형왜중학교졸업하고나갔으면 정신차렸으면고생하고했으니까 공부할지도
그래도재들이났지

2345 2014-04-30 08:08:25
대학진학율 72%청년실업률 9.3%
청년고용율39%
나의지가문제
정신흐러멍텅그래서잠오고시험떨어지나
시험안돼니까취직결혼못한다는데아버지나
아버지탓하는집에있는나나
답답할노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