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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교수신문 서평위원이 뽑은 올해의 책
[특집] 교수신문 서평위원이 뽑은 올해의 책
  • 강내희 서평위원 외
  • 승인 2000.12.19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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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성과 타당성』(위르겐 하버마스 지음, 나남 刊) 외
●『사실성과 타당성』(위르겐 하버마스 지음, 나남 刊)
하버마스가 우리 시대 최고의 사회이론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견이 없을 것이다. 동시대의 많은 사회이론가들은 하버마스와의 끊임없는 대화 속에서 자신들의 사상을 가다듬어 왔다. 1992년에 발표되고 올해 우리말로 옮겨진 이 책은 후기 하버마스의 정치이론을 대표하는 저작이다. 하버마스는 이 책에서 1962년에 발표해 현대 민주주의론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던 자신의 '공공영역의 구조변화'의 문제의식을 더욱 심화하여 담론적 법이론과 민주주의적 법치국가이론을 포괄적으로 재구성하고 있다. 사회의 다원성과 복합성이 증대되는 오늘날의 현대사회에서 근대적 법치국가 이념을 어떻게 제도화할 것인가는 우파는 물론 좌파에게도 커다란 정치적 과제다. 하버마스는 롤스의 정의론에서 코헨·아라토의 시민사회론에 이르기까지 당대 정치이론들을 종횡무진 검토하여 '자유롭고 평등한 시민들의 자율적인 법적 공동체' 모델을 새로운 대안으로 제시한다. 21세기 민주주의의 운명에 관심을 두고 있는 이들에게 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김호기/서평위원·연세대

●『실사구시의 한국학』(임형택 지음, 창작과비평사 刊)
학문의 세계화라는 미명 아래 자리를 잃어 가는 한국학의 방법론을 차분히 제시한 내실있는 책이다. 한문학에서 실학은 민중의식과 결합해 하나의 학문적 유행을 만들어낸 역사가 있다. 더구나 실학은 학문의 위기설 한 가운데 놓여있는 우리가 다시 돌아가야할 공간으로 막연하게 그려지기도 한다. 그러나 임형택은 사적 통찰과 엄정한 균형감각으로 자칫 진부할 수 있는 실학사상에 설득력과 깊이을 더해나간다. 실학에서 말하는 실사구시는 말 그대로 '실제사실(實事)로부터 진리를 추구한다(求是)'는 뜻이지만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변이를 거듭했다. 따라서 임형택은 이 책에서 개념사 정리작업부터 시작했다. 그는 실학을 화석화시키는 그 모든 발전논리를 경계한다. 실학에서 해석이란 실학자의 '근본정신' 파악하는 것이 우선인 까닭이다. 요컨대 올바른 세계인식에 뿌리내린 한국학의 정립을 위해서, 엄정한 '현실인식'에 바탕을 둔 실학자들의 '주체의식'을 파악해야 한다는 것이다. 미풍에도 동요하는 우리들에게 많은 생각거릴 던져주는 책이다.
이필렬/서평위원·방송통신대

●『용병대장』(서정인 지음, 문학과지성사 刊)
서정인의 '용병대장'(독자는 이 책의 종결편인 '말뚝'(작가정신)을 아울러 읽어야 할 것이다)은 15세기 이탈리아 르네상스기의 정치권력과 지식인 세력(종교인, 학자, 예술가) 간의 결탁과 공모 그리고 알력과 배반을 다룬 소설이자, 동시에 이 결탁과 배반의 세계에 저항한 한 반성적 지식인의 투쟁에 대한 최후의 기록이다. 전자로 읽을 때 이탈리아 르네상스기는 만인 대 만인의 협잡의 세계이고, 후자로 읽을 때 작품은 만인 대 일인의 처절한 싸움의 기록이며, 또한 이 기록의 끊이지 않는 전승(傳承)의 드라마다. 우리는 이 작품에서 권력과 지식의 모든 관계를 읽는다. 그런데 작가는 왜 엉뚱한 답사를 떠났던 것일까? 그것은 저 한참 낯선 이국의 옛날이, 권력에로의 편승 아니면 비참한 무기력 속에 빠져 있는 한국 지식사회를 괴상하게 비추는 볼록거울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용병대장'은 그러니까 한국 지식인들을 자의식과 자성의 심판대에 박는 아주 묵중한 쇠망치이다.
정과리/서평위원·연세대

●『전쟁과 사회』(김동춘 지음, 돌베개 刊)
사람들은 김동춘을 두고 '근대의 해부학자'라고 부른다. 김동춘은 최근 들어 한국 근대성의 일그러진 단면을 파헤치는 작업에 몰두해 왔다. 올 한해만도 '근대의 그늘'과 '전쟁과 사회' 같은 일련의 문제작들을 내놓았다. 두 권의 저작을 관통하는 김동춘의 문제의식은 "한국의 독특한 정치·사회질서의 원형은 대부분 50년대를 거치며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책은 단순한 전쟁사 책이 아니다. 저자의 말대로 '한국전쟁이 일반 민중들에게 무엇을 남겼는지, 오늘의 한국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탐구하고자 한 정치사회학적 연구서다. 무엇보다 민중들의 전쟁체험과 기억을 중시하는 사회사적 연구를 통해 한국전쟁의 역사를 복원했다는 점에서, 정치사적 접근에 치중한 기존의 한국전쟁 연구서들과 질적으로 구별된다. 책은 피난, 점령, 학살이라는 세 가지 주제에 걸쳐 민중들에게 전쟁이란 무엇이었는가를 조명한다. 책장 곳곳에서 사료를 접하는 저자의 분노와 슬픔이 느껴지지만 그것이 진술의 객관성을 훼손하지 않는다.
김정근/서평위원·부산대

●『티마이오스』(플라톤 지음/박종현 외 옮김, 서광사 刊)
20세기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화이트헤드는 서양 철학을 가리켜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그만큼 플라톤의 철학은 서양의 정신적 전통을 깊고 넓게 지배해왔다. 그런데 아직도 우리는 플라톤의 저작들에 대한 번역을 다 갖고 있지 못하다. 특히 그리스말 원전번역의 사정은 가히 비참할 지경이어서, 서양학문을 배워온 지난 한세기 동안 그 많던 학자들은 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으로서 스스로 부끄러운 마음을 금할 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박종현·김영균이 같이 번역하고 역주를 붙인 플라톤의 '티마이오스'(Timaios)의 출간은 이런 부끄럼을 덜어주는 커다란 성과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책은 플라톤이 자신의 우주론을 개진한 책으로서, 데미우르고스에 의한 세계창조론 덕분에 기독교철학에 의해 쉽게 받아들여져, 그의 많은 대화편들 가운데서도 후대에 특별히 큰 영향을 미친 책이다. 부디 이 책의 출간이 서양정신과의 보다 깊은 만남의 계기가 되기를.
김상봉/서평위원·철학자

●『한국사회과학의 탈식민성 담론 어디까지 왔는가』(김정근 엮음, 지식산업사 刊)
올해 출판된 다양한 서적 가운데 나는 특별히 '한국 사회과학의 탈식민성 담론 어디까지 왔는가'라는 책에 주목하고 싶다. 이 책은 한 학자의 사상이나 이론을 저술한 책도 아니고, 여러 연구자들이 합동작업으로 이룩한 초록 형식의 보고서일 따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지니는 학문사적 의의는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부산대 김정근 교수를 중심으로 한 작업팀은 '한국 사회과학의 탈식민성 담론에 관한 서지연구'라는 화두로 내걸고, 무려 5년여에 걸쳐 자료를 발굴하고 이 초록집을 펴냈다. 이 작업은 해방후 한국 사회과학이 식민지적 종속성을 벗어나 학문적으로 주체성을 확보해가는 과정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실증적으로 정리한 연구성과이다. 이러한 성과는 사회과학의 여러 분과학문 내에서 한국이라는 현실에 적합한 학문을 위해 노력하는 주체적인 연구자들에게 연대의식을 불어 넣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앞으로 인문과학을 비롯한 다른 분야에서도 이러한 작업이 나오기를 기대해본다.
이승환/서평위원·고려대

●『현대정치경제학의 주요 이론가들』(안청시·정진영 엮음, 아카넷 刊)
경제개혁과 구조조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미래에 대한 불확실성이 확산되고 있다. 이는 단순히 후기 IMF 시대에 맞게된 실물경제의 불안정에서 야기되는 불안일 뿐만 아니라, 철학적 좌표가 결여되어 있는 우리 경제의 취약한 발전이념에서 기인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안청시·정진영이 엮어 낸 이 책은 9명의 국내 학자들이 독서회를 조직, 9명의 세계 석학들의 주요 저서에 관해 발표·토론한 것을 출판한 책이다. 하이에크의 '법, 입법, 자유'에서 허쉬만의 '경제발전의 전략', 폴라니의 '거대한 변환'에 이르는 세계적 정치경제학자들의 저작들을 '우리의 시각'에서 체계화시켜준다는 점에서 경제위기가 재론되는 오늘날의 한국사회에도 시사해주는 바가 적지 않다. 한국적 자본주의의 정립과 관련하여 최근 자유시장경제에 대한 논의가 확산되고 있는 상황에서, 이 책은 우리의 '제도적 제약조건'하에서 새로운 '정부와 시장의 관계'를 모색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사상적 원용의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안석교/서평위원·한양대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윤건차 지음, 당대 刊)
'꽃'이라고 불릴 때까지 꽃은 꽃이 아니라고 한다. 이론도 그 이름을 갖기 전까지는 정체성을 갖기 어렵다. 재일 한국인 학자 윤건차 교수가 쓴 '현대 한국의 사상흐름'은 한국 지식인 사회에 유통되는 이론적 입장들의 정체를 밝히려한 작업이다. 이 책의 특장은 국내에 유통되는 사상들에 이름을 붙이는 모험을 감행한 데 있다. 사실 온갖 학맥과 인맥으로 얽힌 한국의 학계에서 이처럼 무모한 일을 감행하기란 쉽지 않다. 감시와 탄압을 목적으로 사상 계보를 들추어내던 것이 엊그제였다. 사상의 규정 및 평가가 엇갈릴 수 있다는 것도 실명 비평을 하기 어렵게 만든다. 하지만 이제는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고 다른 사람들과의 차이가 무엇이며 그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분명히 해야 할 시점이 되었다. 이 책에서 윤건차는 고양이 목에 먼저 방울을 다는 용기를 보여준다. 덕분에 이제 한국 지식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이론적 입장과 정체, 문제점 등을 내놓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강내희/서평위원·중앙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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