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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 직업의 존엄이 무너지고 있다
공동체와 직업의 존엄이 무너지고 있다
  • 이성민 서울시립대 박사과정·철학
  • 승인 2012.04.02 09: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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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이성민 서울시립대 박사과정(철학과)

이성민 서울시립대 박사과정·철학
2012년 봄인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무너지고 있는 것을 둘 꼽아보라고 한다면 경제와 교육이라고 하고 싶은 사람이 있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는, 많을 것이다. 정말 꼭 그런 것 같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리고 동시에 철학자인 나의 눈에는 사태가 달리 보인다. 나의 눈에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무너지고 있는 두 가지가 공동체와 직업의 존엄이다.

공동체가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는 것은 가령 헤겔이 다시 살아나서 낮에 TV를 틀었을 때 틀림없이 그를 까무러치게 만들었을 수치스러운 상조 광고다. 왜냐하면 그는 가족에 남아 있는 유일무이한 보편적인 인륜적 기능이 장례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종교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요란스럽게 난립하고 있지만, 역시 장례와 관련한 공동체의 근심을 덜어주지는 못하는 것 같다. 또한 현대의 철학자가 이와 관련해서 무능하다는 것도 새삼스럽지는 않다.

직업의 존엄이 무너지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멀리 갈 필요가 없으며, 요즘은 동네에 하나 정도는 그래도 있는 대형 마트를 가보면 된다. 그곳에는 식품점도 있고 꽃집도 있고 서점도 있고 자전거포도 있고 옷가게도 있고 문방구도 있다. 원래 이러한 것들은 거리와 골목에 있었다. 그리고 거리와 골목의 그 가게들에는 주인들이 있었다. 그 주인들의 기능은 이제 대형 마트 종업원들의 기능이 됐다. 작은 주인들은 점점 더 사라져가고, 몇몇 큰 주인들과 수많은 그들의 종업원들이 있게 됐다. 수많은 종업원을 거느린 그 큰 주인들은 아마도 뿌듯할 것이다. 그들의 뿌듯함의 크기는 오늘날 우리 사회가 얼마나 도착적이고 병들어 있는지를 지시한다.

이러한 것들은 공동체와 직업의 존엄이 무너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작은 사례들이다. 사례는 얼마든지 더 있다. 가령 학생들을 가르치는 직업이 있다. 교사나 교수가 그러한 직업에 속한다. 교육은 공동체의 기능이고 교사나 교수는 직업의 이름이므로, 오늘날 그들이 느끼고 있는 문명적이고 근원적인 불만은 공동체와 직업의 존엄이 무너지고 있음을 동시에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오늘날 진지한 교사라면 학생들의 성장과 교육 기능 사이에 근본적인 어긋남이 발생하고 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몇 가지 제도적 개선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님을 또한 잘 알고 있다.

하지만 한국의 근현대사에서 공동체와 직업의 존엄이 제대로 성립해본 적이 있었던가. 이렇게 질문하고 싶은 마음이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성립해본 적이 있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매우 보수적인 생각을 가진 것일 터인데, 왜냐하면 공동체와 직업의 존엄은 예전에 권위주의를 통해서 유지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권위주의의 부활을 통해서라도 다시 살려놓을 수만 있다면 하고 바라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그 마음에 이해가 가는 면도 있다. 세상이 시끄럽지는 않을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한 번 더 따져보는 노력을 마다하지 않는다면 깨달을 수 있는 바, 세상을 시끄럽게 만드는 것은 자본주의와 시장 그 자체다. 공동체와 직업의 존엄을 그 뿌리에서 공격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자본주의 그 자체다.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권위를 침식하는 것도 자본주의 그 자체다. 우리는 가령 대장암에 걸리면 대장암 권위자를 찾는다. 의사의 그 의학적 권위는 권위주의와 본질적으로 아무런 상관이 없는 것이다. 권위를 획득한 의사는 자신의 전문적 분야에서, 인간의 병든 신체를 다루는 그 분야에서 모범적인 공부와 연마를 한 사람이다. 그것은 그 자체로 칭송돼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명예로운 직업을 가진 사람들도 점점 더 돈을 버는 데서 자신의 보람과 능력을 알아본다.

2012년 봄 한국 사회에서 공동체와 직업의 존엄이 무너지고 있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우리는 그렇게 무너지고 있는 공동체와 직업의 존엄을 가져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월드컵 4강에 오른다는 사실이나 삼성의 제품이 세계적으로 선전하고 있다는 사실이 우리의 공동체와 존엄을 살려주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러한 것은 결코 우리의 근현대사에 존재한 적이 없었으므로, 새롭게 구축해볼 욕망을 가져볼 수는 있는 것이다. 허황된 종교적 희망에서가 아니라 오늘날 근본화된 문명 속의 불만을 철학적으로 고찰하면서 말이다.


이성민 서울시립대 박사과정·철학과
서울시립대에서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도서출판b 기획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 『사랑과 연합』이 있으며, 역서로는 슬라보예 지젝의 『까다로운 주체』 외에 여러 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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