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十趣軒에서 다시 생각하는 화이부동
十趣軒에서 다시 생각하는 화이부동
  • 임기중 동국대 명예교수·고전시가
  • 승인 2012.04.02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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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_ 임기중 동국대 명예교수(고전시가)

임기중 동국대 명예교수·고전시가
새벽을 알리는 새소리와 밤사이 흐르던 물소리를 들으며 아침을 열고 싶다. 창문을 열고 상쾌한 아침 공기를 마음껏 마시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경적소리와 매연이다. 깨끗한 산과 맑은 물이 있는 곳으로 가서 살고 싶다. 한적한 시골 인심 좋은 마을에 가서 조용히 살고 싶다. 그러나 현실은 이사 갈 수 있는 형편이 아니다. 이사 갈 형편이 못 될 때 원하는 것을 성취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새 소리 물소리 맑은 바람 소리의 음반을 구해 들으면서 十趣軒의 아침을 열고 있다(十趣軒은 20세기 후반 한국 한 인문학 교수의 정년퇴임 후 연구실 落穗다).

釋門에서 ‘一切唯心造’라고 하지 않았던가. 마음이 미치는 곳에 바라는 것이 있다. 흐르는 물이 보고 싶어서 살고 있는 집을 觀水齋라고 했더니 아파트 사이로 강이 흐르고 있는 것이 보였다. 비가 갠 뒤에 시원한 달이 오르는 산을 보고 싶어 거실을 東峯凉月之室이라고 했더니 어느 날 아침 멀리서 산봉우리가 다가오더니 밤에는 달이 오른 산도 보였다. 향가와 가사와 연행록에 희망을 걸었을 때는 살고 있는 집을 三希堂이라고 했더니 그 옆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었다.

담배도 못 태우고 술도 즐기지 않고, 바둑도 못 두고 골프도 못 치므로 무기호에 무취미라고 간혹 구박을 받는 때가 있어서 정년퇴직을 하고 집 이름을 十趣軒이라고 했더니 몇 가지의 취미를 갖고 살아왔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됐다. 집 이름이 달라질 때마다 그리고 삶에서 드러나는 다소의 특색을 가진 나이테가 생겨날 때마다 돌에 각을 했더니 그것이 모였다. 가사와 연행록에 따라다니는 옛사람들의 필적도 생각 밖으로 적잖이 모였다.

고문서 먼지 때문에 기관지가 나빠지는 것 같아서 蘭과 梅를 기르기 시작했다. 생명체의 유한성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겠는가. 죽지 않는 아름다움을 생각하다가 수석에 관심을 갖게 됐다. 선현들의 필적 옆에 傍書를 하다 보니 연적과 필세, 문진과 필가, 필통과 먹상 등이 모여 들었다. 때때로 차를 마시다 보니 여러 형태들의 차호들도 모였다. 중국학자들이 연행록 일로 찾아오는 일이 한동안 잦더니 향과 향로도 여러 개가 모였다. 학생들과 때때로 탁본을 하면서 옛 탁본들에 관심을 가졌더니 그것도 여러 종류가 모였다. 정년퇴임 뒤 종종 잠 못 이루는 밤이 많아져서 세계 여러 나라의 자장가 음반을 모아 듣기 시작했더니 그것도 적잖이 모였다. 이만하면 이미 十趣軒 주인이 돼 있는 것이 아닌가. 이제 『十趣軒 雅玩』이라는 책을 하나 펴내 知音들과 같이 즐기고 싶다.

하루에서는 저녁의 여유를 즐길 수 있어야 하며, 일 년에서는 겨울의 여유를 즐길 수 있어야 하고, 사람의 한 생애에서는 말년의 여유를 즐길 수 있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 같다. 교수들은 방학의 여유를 즐길 수 있어야 하겠지만 요즈음의 추세는 그와는 반대로 방학이야말로 연구실적을 제고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치열한 경쟁의 시기가 돼 있는 것 같다. 이 시대 교수들이 밤의 여유를 즐길 수 있을까. 밤새 연구실에서 연구에 몰두해도 늘 시간이 모자랄 것이다. 그러나 매일매일 그 하루가 아주 중요하지 않은가. 하룻밤의 여유를 갖지 못하는 사람이 어떤 다른 여유를 찾아 즐길 수 있겠는가.

교수를 밖에서 누가 무엇으로 어떻게 평가한다는 말인가. 밖으로 들어난 것은 빙산의 일각도 아닌 것을 갖고. 평가를 한다면 자기가 자기를 가장 잘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의 자기평가가 가장 정확하고 가장 무서운 평가일 것이다. 자기를 잘 평가하려면 아무리 바빠도 잠자리에 들기 전 初心歸還樓에서 초심의 자기와 여유로운 만남의 시간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和’만 갖고 어떻게 좋은 교수가 될 수 있겠는가. ‘不同’이 있어야 진정한 ‘和’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和而不同’이 이 시대의 교수들에게 요청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여유로운 밤이 없다하여 어찌 참 나를 잃어버릴 수 있겠는가.

 

임기중 동국대 명예교수·고전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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