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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소 출신 학자들 곳곳에서 활약... 금기시됐던 문제들 공론장으로 불러낸 것 성과
"연구소 출신 학자들 곳곳에서 활약... 금기시됐던 문제들 공론장으로 불러낸 것 성과
  • 윤상민 기자
  • 승인 2012.03.27 13:4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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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립 40주년 맞은 극동문제 연구소, ‘동북아시아 핵 문제의 재고’ 국제학술대회 열어

통일은 고사하고 북한에 대한 이야기조차 금지되던 시기에 북한학을 시작하고 40년간 활발하게 연구 활동을 펼쳐온 곳이 있다. 바로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소장 이수훈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극동문제연구소는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과 함께 지난 21일 서울 프라자호텔에서 ‘동북아시아 핵 문제의 재고’를 주제로 개소 40주년 기념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했다.

왼쪽 앞줄 네번째가 만프레드 리히터 프리드리히 나우만 재단 이사, 그 옆이 박재규 경남대 총장, 그리고 앞줄 오른쪽 두번째가 극동문제연구소 소장인 이수훈 교수다.
이번 학술대회 참가자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40년 관록의 역사를 확인할 수 있다. 20년 전 극동문제연구소에서 연구원을 지낸 최대석 이대 교수(북한정치)는 “그때 함께 연구했던 동료들이 저명인사가 되어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면 감개무량하다”라고 소회를 밝히며 “박재규 총장의 전폭적인 지원이 오늘의 극동문제연구소를 가능하게 했다”라고 말했다. ‘북핵문제와 김정은 체제’에 관해 기조연설을 한 박재규 총장은 통일부 장관 시절 남북관계에 중차대한 역할을 해왔다. 박 총장의 실무경력과 연구에 대한 지속적인 열정이 오늘 극동문제연구소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하다고 할 수 있다. 토론자로 참가한 피터 벡 박사(아시아재단한국지부대표) 역시 17년 전 극동문제연구소에서 일한 경력이 있다. 그는 이 인연으로 극동문제연구소와 아시아재단과의 관계를 계속해서 강화시키고 있는 중이다. 

 

사회과학계가 보는 극동문제연구소

극동문제연구소에 대한 학계의 반응은 크게 둘로 나뉜다. 교육인력을 양성에 주력해달라는 주문과 사회과학연구소로서 ‘맏형’의 역할을 감당해 달라는 것이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북한정치)는 “북한학이 불모지였던 시절에 연구소를 설립하고 흔들림 없이 이끌어온 박재규 총장의 공이 크다”며, 이런 사회과학연구소가 지속적으로 존립가능하려면 경남대의 경우처럼 학교의 지원이 절대적이라고 말했다. 고 교수는 경남대가 북한대학원대학교를 설립한 것을 주목하며 “국제학술대회 같은 교류사업도 좋지만, 명실상부하게 연구소가 교육체계를 가지고 있으니, 학문적으로 인력을 양성해 나가고 교육하는 일에 더 신경을 써 주길 바란다”는 견해를 밝혔다.

반면 유호열 고려대 교수(북한학)는 “사실 북한 연구나 한반도 문제에 대해서 극동문제연구소가 기여한 바가 상당히 크다”며 극동문제연구소는 민간연구소로서 자료 확보, 관련학자들 간 교류 증진에 단연 독보적인 행보를 보였다고 말했다. 유 교수는 “연구여건이 열악했던 8~90년대 학위를 마쳤거나, 외국에서 학위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연구소에서 연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은 한반도 문제 연구자들에게 큰 도움이었다”라고 회상했다. 그는 특히 ‘서구의 정치, 사회학을 도입하여 연구하던 학계 흐름에서, 극동문제연구소는 우리 문제를 우리 시각에서 연구했던 단체‘라고 말하며 담론을 생산하고 대안을 마련하는데 많은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그는 극동문제연구소가 동북아 관련 연구소 중 ’맏형‘의 역할을 앞으로 감당해 줄 것을 당부했다. 다양한 의견들을 분출하는 것만이 아니라 학문적으로 정리, 종합하고, 구체성을 띄고 분화하는 신규학회들을 아우를 수 있는 연륜을 보여달라는 주문이다.

극동문제연구소는 1972년 마산에 위치한 경남대에 설립된 ‘통한문제연구소’가 그 전신이다. 설립 초기에는 불온간행물 취급기관으로 문교부의 인가를 받고서야 연구가 가능했고 삼청동으로 연구소 이전 후, 점차 그 지평을 일본, 중국, 소련, 제3세계로 확장시켜나갔다. 미약했던 초기 활동에 비해 비약적으로 발전한 극동문제연구소는 북한, 남북한, 통일 그리고 국제정세에 관한 국내외학술대회와 세미나를 개최해왔다. 연구 업적과 실무 경험이 차곡차곡 쌓인 성과로 1981년 문교부선정 사회과학 분야 최우수 연구소로, 1993년에는 병역특례연구기관으로 선정됐다. 1996년으로부터 연속 5년간 영문정기간행물 <Asian Perspective>가 한국학술진흥재단으로부터 사회과학분야 우수 학술지로 선정되기도 했다. 1995년부터 시작한 통일전략포럼은 49차에 이르렀으며 지금은 동북아지역문제에 관한 담론을 가장 활발하게 생산하는 대표적 연구소로 자리 잡았다. 또한 석?박사학위를 준비하는 학생들을 위한 인턴쉽을 실시하고 해외학자를 초빙하여 교류를 증대하고 있다. 영문정기간행물인 <Asian Perspective>를 비롯해 <한국과 국제정치>, <동북아연구>를 발행하고, 북한 종합개발계획 및 각 분야별 발전전략을 수립하고, 이를 관련 당사국이 실천하는데 기여하고자 설치된 북한개발국제협력센터(ICNK) 운영하는 등 통일시대를 대비하는 중심지로의 몫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하지만 반공정서가 지배적이고 사상, 학문의 자유가 제한됐던 초창기에는 자료를 모으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이 소장은 “박재규 총장이 틈틈이 해외출장에서 몰래 자료를 구해왔고, 그렇게 하나 둘 모인 자료가 오늘 결실의 밑거름이 됐다”고 말했다. 또 그는 “사립연구기관으로서 이렇게 오랜 기간 연구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대학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며 공을 돌렸다.

사립대로서 북한연구 선도한 것에 자긍심

40주년 기념 학술대회 주제가 ‘다시’ 핵으로 돌아간 것에 대해 이 소장은 “사실 핵이라는 것 때문에 많은 것들이 꼬여있다. 국제관계, 경제관계, 북한 뿐 아니라 사회 전반적인 상황이 핵과 무관하지 않다”며 거시적인 안목으로 근본, 본질로 돌아가자는 의도로 학술대회를 준비했다고 밝혔다.

지난 40년간 극동문제연구소에서 이룬 업적을 말해달라는 질문에 이 소장은 ‘금기시됐던 것들을 공론의 장으로 불러온 초석의 역할을 한 것’ 과 ‘국책연구기관이 아닌 사립대학으로 북한 연구에 선도적 역할을 한 것’ 말고는 내세울 것이 없다고 말을 아꼈다. 하지만 그는 “40년 전에 비해 연구여건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아졌지만, 정작 연구의 대상인 북한의 현실이 40년 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았다”며 안타까운 표정을 내비쳤다. 이 소장은 앞으로 화해와 협력의 분위기를 만들어 한반도의 점진적 평화통일을, 나아가 세계 평화에 사명을 감당하는 것이 극동문제연구소의 목표라고 밝혔다.

 

윤상민 기자 cinemonde@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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