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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典공부도 먹고사는 공부도 ‘살구나무’ 아래에서
經典공부도 먹고사는 공부도 ‘살구나무’ 아래에서
  • 김월회 서울대·중어중문학과
  • 승인 2012.03.26 15:3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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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인문교육과 고전읽기 ❷ 학교에서는 고전을 어떻게 가르쳤나(동양편)

고전은 ‘시간의 잔혹함 속에도 무수한 사람들의 검증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책’일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일까. 대학에서 고전의 활용방안을 지성사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논쟁의 불을 지피고자 합니다.

10가지 동일한 주제를 놓고,  동·서양 고전의 역사를 번갈아 싣습니다. 동양은 김월회 서울대 교수(중어중문학과)가 중국의 고전교육 역사를 중심으로 논지를 이어가고, 서양은 안재원 서울대 HK연구교수(고전라틴문학)가 로마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서양 고전의 역사를 따라갑니다.

 

송대 이후 천여 년의 성상 동안 학교 역할을 수행했던 서원. 그 특징을 논하는 자리에서 黃宗羲는 이렇게 말했다.

“서원에서 비난하는 바가 있으면 조정은 틀림없이 옳다 여기며 자랑스러워하고, 서원에서 옳다 하는 바가 있으면 조정은 반드시 틀렸다며 치욕스러워 한다.” 『明夷待訪錄』

조정에서 세운 학교, 그러니까 국립학교에 해당되는 官學이 제 기능을 온전히 발휘하지 못했던 시절, 준공립 성격의 서원은 수많은 과거 합격생을 낳았던 관료 배출의 최대 산실이었다. 그러한 서원이 조정과 척을 지고 있었다니,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서서히 벌어지는 학술과 정치

고대 중국에서 학교란 제도가 체계적으로 갖춰진 때는 漢代였다. 수도 장안에는 최고 학부인 太學이 문을 열었고, 지방에도 행정단위별로 관학이 설치됐다. 그 전에는 五經博士란 학관이 있었다. 조정에 『역』, 『춘추』, 『예기』별로 博士館을 두고 귀족의 자제들을 가르쳤던 기구로, 태학은 이 전통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언뜻 태학과 조정이 통짜로 보이는 까닭이다.

사실 천자를 ‘君師’라 칭하던 관습에서 보이듯, 중국에서 학교는 시작부터 政事와 긴밀하게 연동돼 있었다. 상고시대에 있었다는 벽옹이나 명당, 상, 서와 같은 학교는 관료를 양성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천하를 다스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만들어냈다고 한다. 교육은 으레 정치와 한 몸을 이뤄왔던 것이었다.

그런데 태학은 이러한 전통 위에 서 있으면서도 그와는 다른 길도 함께 열고 있었다. 다시 청대 초엽의 석학인 황종희의 진술을 들어보자.

“後漢 때 태학의 학생 3만 명은 권세 높은 자라 하여 가리지 않고 올곧게 발언하고 엄정하게 논파하니, 공경대부들은 그들의 비판을 모면하려 애썼다.”

여기서 현실권력의 위세에 아랑곳하지 않고, ‘淸議’라는 서릿발 같은 여론을 생산하던 태학의 맑은 풍기가 목도된다. 물론 고관대작인 공경대부들도 가만히 있지만은 않았다. 조정은 태학의 학생은 실제 정사에 간여해서는 안 된다는 규정으로 청의에 응대했으니, “학교와 조정은 서로 간여하지 않았다”는 황종희의 보충 발언처럼 교육과 현실권력은 결국 합의이혼을 한 셈이었다.

학교와 조정의 분리, 곧 학술과 정치의 분리는 이렇게 제도적으로 실현됐고, 청의가 상징하는 정치에 대한 학술의 우위는 현실 정치의 발밑을 관류하며 서원으로 고고하게 유전됐다. 입신양명이나 정사에의 참여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사안이었다. 물론 과거 대비 전문학원 노릇을 한 함량 미달의 서원들이 활개치고 있었지만, 최소한 주희의 삶과 학문을 올곧게 계승하고자 했던 서원에서 만큼은 경전을 공부하되 그것에 덧대 있는 정치의 권위를 벗겨내고 경전의 내용만을 순수하게 다루고자 했다. 그렇게 학술과 정치의 거리가 갈수록 벌어졌다.

급기야 ‘서원과 조정은 서로 등을 지는’ 형국이 초래됐다. 경전을 떠받치던 정치적 권위가 학교로부터 소외당했고, 그것이 비워진 자리에는 ‘성현의 가르침이 담긴 텍스트’라는 학술적인 권위만이 덩그러니 남았다. 서원은 이 권위의 수호자를 자처하고 나섰다. 거기에 모인 이들은 일상을 공유한 채로 경전을 강독하고, 그에 담긴 義理를 규명코자 치열하게 담론하며, 성인의 말씀을 생활세계로 확충하는 데에 힘썼다.

문제는 이러한 노력이 지나치게 엄숙하게 수행됐다는 데서 비롯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학술적 권위를 남용하는 서원이 속출하자, 그 권위마저 해체하고자 하는 또 다른 유형의 서원이 등장했다. 心學을 제창하며 주자학을 비판했던 왕양명과 그의 제자들이 세운 서원이 그것이었다.

거기에선 주자학도의 서원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신분의 벽을 넘어 사농공상이 한데 어울려 강학에 참여하고 있었다. 주자학도의 서원에서처럼, 수학 연한에 따라 경전을 달리 하며 엄격하게 해독하고 정밀하게 주해하는 훈육 방식은 찾아볼 수 없었다. 경전의 의리를, 성현 말씀의 원의를 투명하게 밝히는 것이 서원 교학의 목적이 아니었다. 경전을 읽지 않더라도 타고난 저마다의 지성과 역능을 일깨우고, 이를 삶터에서 활용할 줄 알면 그것으로 족했다.

학술적 권위 벗고 ‘함께 하는 노님’

이들에겐 고전적인 텍스트는 물론이고, 고전 중의 고전인 경전조차 꼭 익혀야 할 바는 아니었다. 그들의 도움 없이도 앎을 획득할 수 있다고 여겼으니, 경전에 남아 있던 학술적 권위는 이들 앞에선 무기력해질 수밖에 없었다. 아니 왕양명의 문도들은 공자의 이름으로 이를 적극적으로 허물었다. 그들이 보기에 공자는 옛 성인들처럼 “모든 사람들과 함께 밝히고 함께 이루었던 학문(人人共明共成之學)”을 행한 전형이었다. 그는 자신의 학교인 살구나무 아래(杏亶)서, 월사금을 낸 이라면 출신을 따지지 않고 누구든지 가르쳤다.

동일한 목표를 위해 한 가지 내용만을 가르치지도 않았다. 여섯 경전에 대한 총체적이고도 상세한 이해를 전수받은 72명의 제자가 있었는가 하면, 먹고 사는 데에 필요한 직능을 익히고 지식을 얻는 데에 만족한 수천의 문도들도 있었다. 하여 자하는 공자의 가르침을 회고하며, 뜰에 물 뿌리고 마당을 쓸며 손님을 대접하고 들고 남에 몸가짐을 바로 하는 것 모두 군자가 배워야 할 바라고 단언할 수 있었다. 공자도 그저 제자들과 일상을 공유한 채로, 삶을 놓고 대화하고 앎에 대해 실천하며 그들과 ‘함께’ 경전에서 노닐고자(游於藝) 했을 뿐이었다. 

학교와 경전에서 학술적 권위마저 벗겨낸 양명의 문도들은 그 빈자리를 ‘삶에 붙은 앎’과 ‘함께 하는 노님’으로 채워 넣었다. 그리하여 공자의 杏亶이 그러했듯이, 양명학도들의 서원도 “선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선생과 학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학생이 어떤 나무 밑에서 이야기하는 것에서 시작된”(루이스 칸, 현대건축가) 학교를 빚어냈다. 

김월회 서울대·중어중문학과

서울대에서 박사를 했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지냈다. 중국근대학술사 전공으로 「동태적 인문으로서의 통합적 학문」, 『살아 움직이는 동양고전들』 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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