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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의 감각과 사유의 내부를 비추는 통로
화가의 감각과 사유의 내부를 비추는 통로
  • 홍지석 미술평론가
  • 승인 2012.03.17 10: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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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_ 예술가들의 작업실 풍경

최근 우리 미술계의 큰 관심사 가운데 하나는 ‘작업실’이다. 먼저 중요 미술기관들의 작가 후원이 작가 레지던시 프로그램에 집중되고 있다는 점을 언급해야 한다. 지금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을 위시해 대부분의 중요 미술기관이나 비영리재단들은 작가들에게 일정 기간(통상 1~2년) 무료로 작업실을 제공하는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작품 제작 후원이나 프로젝트 지원에 치중하던 예전과는 크게 달라진 모습이다. 이러한 상황은 미술담론 분야도 마찬가지여서 근래 들어 작업실 탐방이나 작업실에서의 작가인터뷰를 주제로 내건 출판물들이 증가 추세다. 『작업실-예술가의 비밀을 훔치다』(씨네21, 2010),『작업실의 고양이』(아트북스, 2011)『작업실-24명의 아티스트 24개의 공간 24가지 취향』(우듬지, 2011)『화가의 집-화가가 머물고 그림이 태어난 집을 찾아서』(아트북스, 2011) 같은 책들 말이다.

비평가들은 왜 작업실을 궁금해할까

이렇게 작업실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는 현상은 미술계에서 진행 중인 지향성의 변화라는 관점에서 관찰될 필요가 있다. 즉 예전에는 미술을 전시장에 배치된 완성작 자체로 감상/평가하는 태도가 지배적이었다면 지금은 그것을 구상에서 마감에 이르는 작업의 전 과정 속에서 바라보고 평가하는 태도가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변화는 확실히 미술 작가와 작품을 보다 구체적이고 광범위한 문맥 속에서 감상, 평가, 지원할 기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흐름이 제도적으로 정착되고 지속적으로 긍정적인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충족돼야 한다.

파스텔 가루가 잔뜩 묻은 화가의 손을 보여주는 민경숙의 작업실 풍경.

 일단 작가의 작업 형태와 규모, 세대, 생활 방식을 감안한 다양한 작업실 지원/후원 프로그램을 계발하는 것이 시급한 당면과제다. 또 작가 작업실과 지역공동체의 교류방식에 대한 갖가지 모색이 뒤따라야 한다. 미술비평의 관점에서 보면 작업실을 주제로 한 새로운 비평담론의 구성이 시급한 과제다. 작가의 의도/발언, 작품구조나 형식, 양식 변화에 초점을 둔 기존의 비평으로는 ‘작업실’이라는 주제에 적절히 접근하는데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중견 미술평론가 박영택(경기대)이 올해 초 내놓은『예술가의 작업실』(휴먼아트, 2012)은 주목할 만한 저작이다. 각기 다른 재료와 주제로 작업하는 12명 작가의 작업실을 다룬 이 책은 『예술가로 산다는 것』(마음산택, 2001)에 이어 미술가 작업실을 다룬 저자의 두 번째 저작이다. 여기서 우리는 작업실을 주제로 내건 미술비평이 갖는 가능성과 한계를 발견할 수 있다.

작가의 작업실을 주제로 삼은 비평가의 시선은 어디로 향할게 될까. 박영태의 경우 그의 시선은 물질과 연장으로 향한다. 구체적으로 그것은 물감, 먹, 흙과 나무, 돌, 철 같은 재료들과 '손때가 반질거리는 연장들'이다. 그 연장들은 이 비평가에게 “그것들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시간을 함께했을 작가의 몸놀림, 노동의 흔적”을 떠올리게 한다. 박영택에 따르면 그것들은 작품들 못지않게 한 작가의 모든 것을 감지하고 이해하기 위한 통로요, 그의 감각과 사유의 내부로 들어가기 위한 통로다.

신문지에 볼펜과 연필로 선을 긋는 남자, 최병소의 작업실 풍경.

이런 시각에서 그는 작품을 감상하는 일은 “우선적으로 작가들이 다루는 물질과 연장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 속성과 이치를 체득하는 일”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것이 바로 책의 부제가 ‘물질과 연장 그리고 작가의 영혼이 뒹구는 창조의 방’이 된 이유다.

비평가가 작가에게 다가가는 일, 그 물질과 연장의 온전한 이해와 속성의 체득은 오로지 작업실에서만 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작업실에서 이 비평가를 감동케 하는 것은 먹을 흠뻑 빨아들이고 다시 내뱉기를 반복해 '지치고 시들하다 못해 가련해 보이는 붓들'(김호득)이고 반복된 볼펜 긋기를 통해 군데군데 찢기고 구멍이 뚫려 끝내 '검고 빛나는 이상한 껍질-새까만 어둠이 된 종이'다(최병소). 또는 온통 물감의 바다 같은 '어질한 유화 물감과 기름 냄새가 진한 작업실', '붉은색 물감으로 물든 하얀 운동화'(홍정희)이거나 두 종류의 인화지를 바닥에 밀착시키고 무거운 자로 누르며 작가가 그어대는 칼질, 그 “망막과 고막을 슥슥 지나가던 선들”(조병왕)이다. 이렇게 작업실을 방문한 비평가를 압도하는 것은 물질을 다루는 작가 노동의 섬세함과 强度다. 그는 그 섬세함, 그 강도에 압도되어 '파스텔 가루가 잔뜩 묻은 화가의 손'(민경숙), '드로잉이 넘쳐나는 공간'(이강일)을 예찬한다.

이렇게 『예술가의 작업실』에 등장하는 작가들은 대부분 ‘인고의 세월과 지독한 노동’을 감내하는 작가들이다. 이 비평가는 그 세월, 그 노동을 지켜보기 위해 작업실을 찾는다. 박영택의 방식으로 이 작가들을 묘사하면 그들은 “물질을 물질로 보지 않고 또 다른 생명체로 여기는, 물질에 영혼을 불어넣고 물질과 함께 몽상하며 사는 일종의 물신주의자이며 정령주의자”(정종미)다. 작가란 “자신과 궁합이 맞는 물질을 찾아 그것과 함께 살아온 삶의 궤적을 보여주는 존재들”(최기석)인 까닭이다.

그 반대편에는 이 비평가에게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되는 동시대 현대미술 곧 '아이디어와 언어, 개념의 현란한 유희'가 존재한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박영택이 ‘예술가의 작업실’을 표제로 하여 저작을 내놓은 것은 언어와 개념의 현란한 유희에 맞서 생을 걸고 물질을 대하는 작가들의 노동을 옹호하기 위한 전략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접근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처럼 현실에 존재하는 다양한 작업실의 양태를 재단하고 양식화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독한 노동을 혐오하거나 물질을 몽상의 재료로 삼기보다는 그 자체로 드러내려고 시도하는 많은 작가들, 그리고 그들의 작업실이 또한 존재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양상은 박영택의 경우처럼 간단히 ‘아이디어와 언어, 개념의 현란한 유희’로 내칠 수 없는 것이다.

주관적이면서 공감 가득한 예찬 

하지만 이런 한계에도 불구하고 작업실을 무대로 하여 전개되는 박영택의 생동하는 묘사와 서술은 작가와 작업에 보다 구체적으로 보다 현실적으로 그리고 어쩌면 좀 더 인간적으로 접근할 길을 열어준다. 가령 다음과 같은 구절을 보자.

"작가는 작은 방으로 스며드는 빛에 의존해 세상에 풍경과 사물들을 하나씩 호명해 올려놓는다. 애초에 무엇을 그리겠다는 인식과 그림에 대한 선험적인 의도를 지우고 자기 눈과 마음을 세상에 맡겼다. 그녀의 파스텔 조각들이 사물에 육체성을 부여하고 빛을 주고 색채를 감싸 주었다. 그렇게 해서 보고 만지고 먹고 사랑했던 것들을 되살렸다. 그녀는 그런 기적을 오늘도 묵묵히 행하고 있다."(민경숙, 34쪽)

"도병락이 차갑고 딱딱한 고무판에 꽃을 피워 내는 일이야말로 어둠과 죽음 속에서 희미한 생명을 발견하는 일과 하등 다르지 않다. 그래서 그는 오늘도 그 검은 고무판과 마주한다. 그 어둡고 눅눅한 지하 작업실에서 혼자만의 시간을 견뎌내면서 말이다"(도병락, 152쪽)

이성적, 지적인 서술이 지배적인 현재의 미술비평 풍토에서 위의 인용문처럼 주관적이면서 동시에 공감을 이끌어내는 감탄, 예찬을 만나는 일은 드문 일이다. 그것이 설득력을 지니는 것은 오랜 기간 작가들을 계속해서 관찰해 온 비평가의 인내, 작업실을 찾아 몸을 움직인 그의 노고에 있을 것이다. 물론 그 예찬이 지나치게 반복될 때 독자들은 지치게 될 것이다. 어쩌면 작업실 비평이야말로 동화와 이화를 적절하게 조율하는 비평가의 역량을 요구하는 분야일지 모르겠다.

홍지석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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