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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로트만'의 신화적 세미오시스를 향한 지적 탐험
'유리 로트만'의 신화적 세미오시스를 향한 지적 탐험
  • 최용호 한국외대 교수
  • 승인 2012.03.17 10: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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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평_ 김수환, 『사유하는 구조』(문학과지성사, 2011.12)

 

모스크바-타르투 학파의 수장 유리 로트만은 기호학의 역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한 가지 질문으로 시작하자. 철학이라는 학문의 창시자는 과연 누구일까? 플라톤? 아니면 플라톤의 대화편에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소크라테스? 서양 철학사 개론에서 늘 소크라테스 이전 철학에 대해 일정 부분이 할애되고 있는 걸 보면 분명 소크라테스가 철학의 창시자라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렇다면 물리학은? 수학은? 이 같은 질문에 대해 독일의 철학자 후설은 ??기하학의 기원??에서 한 학문의 기원에 창설적 몸짓을 행한 누군가가 존재한 것은 사실이지만, 학문의 이념적 존재방식과 그것의 창시자와의 관계는 전적으로 자의적임을 지적한 바 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20세기 출범한 두 학문에 대해서는 그의 지적이 적합하지 않은 듯 보인다.

 

정신분석학과 기호학이 그 두 학문이다. 정신분석학이라는 학문에는 지그문트 프로이트라는 창시자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이 학문의 존재방식에 그의 이름은 우연적이라기보다 필연적이다. 라캉이 옹호한 프로이트로의 회귀라는 테제는 이런 필연성을 방증한다. 기호학의 경우에는 사정이 좀 더 복잡하다. 주지하다시피 기호학의 기원에는 페르디낭 드 소쉬르와 챨스 샌더스 퍼스라는 걸출한 두 명의 창시자가 존재하며, 그 이후에도 계속해서 기호학은 이러한 창설적 몸짓을 되풀이함으로써 발전을 거듭해 왔기 때문이다. 예컨대 파리학파의 기호학은 그레마스의 기호학으로 불리며, 바르트의 기호학이 있는가 하면 에코의 기호학도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오늘날 이러한 거장들의 목록에 모스크바-타르투 학파의 수장 유리 로트만을 추가하는 데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문화기호학이라고도 불리는 기호학은 사실상 그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기호학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의 이름으로 대표되는 학문.

문화기호학 입문서를 뛰어넘어

하나의 부분이 전체의 구성 요소 중 하나가 아니라 이처럼 전체를 대표할 때 로트만은 이를 신화적이라고 부른다. 기호학은 모든 과학의 메타언어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에서 어쩌면 학문 자체가 신화적인 속성을 가진 것인지도 모른다. 김수환은 『사유하는 구조』에서 바로 이 신화 개념을 중심으로 로트만의 기호학적 사유의 궤적을 두 부분으로 나누어 추적한다. 전반부에는 도상과 공간이라는 테마가, 후반부에는 인격과 폭발이라는 테마가 각각 다루어지는데 전반부에서 후반부로 넘어가는 이행의 과정에 신화가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그런데 저자가 자의적으로 설정한 이 사유의 매듭들은 언뜻 보기에 서로 관련이 적어 보일 뿐만 아니라 사실 전통적인 기호학적 테마로도 대단히 생소한 것들이다.

통상 기호학은 의미의 과학이나 커뮤니케이션의 과학으로 정의된다. 이 과학의 대상은 기호, 즉 세미오시스라고 할 수 있는데, 이를 어떻게 정의하느냐는 기호학적 쟁점 사항 중 하나이다. 이를테면 소쉬르는 시니피앙과 시니피에의 결합으로, 퍼스는 표상체와 대상체와 해석체 간의 상호작용으로 세미오시스를 정의한다. 물론 로트만의 문화기호학에서도 이와 관련된 이론적 요소들과 쟁점들을 찾아볼 수 있다. 로트만은 하나의 예술을 한편으로 삶의 반영 수단으로 고려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커뮤니케이션의 한 형태로 간주한다. 이러한 예술론이 문화기호학의 전신임을 감안할 때, 전자는 의미의 과학에, 후자는 커뮤니케이션의 과학에 각각 상응하는 정의이라고 할 수 있다. 에코가 소쉬르로 대변되는 유럽 기호학 전통과 퍼스로 대표되는 영미 기호학 전통을 통합하기 위해 기호학을 의미의 과학이자 커뮤니케이션의 과학으로 정의한 것을 상기한다면 로트만도 자신의 예술론에 기초해 나름 통합 모델을 제시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에코의 통합적 기획이 백과사전적인 세미오시스를 지향한다면 로트만의 경우에는 신화적인 세미오시스로 구현된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로트만의 문화기호학은 기호학적 쟁점들에 개입하고 여기서 다루어지는 여러 현안에 대한 나름대로의 통찰과 해법을 펼쳐 보이고 있다.

하지만 김수환은『사유하는 구조』에서 상술한 다섯 가지의 테마를 중심으로 로트만의 기호학 사상을 다소 낯선 방식으로 소개한다.『사유하는 구조』는 유리 로트만의 문화기호학에 대한 입문서라기보다는 상당히 전문적인 연구서에 가깝다. 이 책에서 저자는 로트만의 저작 전체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하는 대신 하나의 독법을 제시하는 편을 택한다. 모든 독서는 콘텍스트 속에서 텍스트를 읽는 해석학적인 작업, 즉 재맥락화로 이루어진다. 로트만의 독자적인 사유의 움직임은 한편으로는 구조주의와, 다른 한편으로는 후기구조주의와의 대면을 통해 서서히 그 윤곽을 드러낸다. 그런데 저자에 따르면 로트만의 기호학 사상은 사실상 구조주의적인 것도, 후기구조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저자가 로트만의 기호학을 다루면서 도상, 공간, 신화, 인격, 폭발이라는 테마를 동원한 것은 다름 아닌 이러한 이중부정의 해체적 전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이다. 이는 말하자면 로트만의 사상을 재맥락화하면서 결국에는 탈맥락화하려는 이중의 전략이라고 하겠다. 그 결과 로트만의 이름은 보통명사가 아닌 고유명사로서 당당히 기호학사에 각인될 수 있게 된다. 먼저, 도상은 단순히 도상적 기호가 아니라 삶을 반영하는 수단, 즉 2차적 모델링 시스템으로 인식된다. 요는 이러한 의미론적 기획이 분절언어에 기초한 구조주의의 자족적인 태도에 대한 비판으로 읽힌다는 점이다. 이어, 공간은 내부와 외부 그리고 경계로 이루어진 문화기호학의 문법 모델인데, 이 같은 공간에 대한 관심은 구조주의 모델이 주로 시간성에 호소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예컨대 구조주의 서사학에서는 서사성이 처음상태의 나중상태로의 변형으로 정의되는데 비해, 로트만은 이를 내부와 외부를 가르는 경계의 횡단, 즉 위반으로 해명한다. 로트만의 기호학 사상은 이처럼 구조주의뿐만 아니라 해석의 개방성에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않는 독자 중심의 후기구조주의와도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로트만 사유와 모던의 끝

로트만에 따르면 하나의 텍스트는 독자의 전유물이 아니라 오히려 독자에게 어떤 효력을 발휘하는, 바르트 식으로 말하자면 푼쿠툼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로트만의 문화모델이 분절언어 대신 도상언어만으로, 시간성 대신 공간성만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잘못이다. 분명 전자보다는 후자에 방점이 찍히는 것이 사실이지만 로트만의 모델에서는 이중 언어 또는 복수언어의 혼종성이 본질적인 문화적 특질로 다루어지기 때문이다. 여기서 번역 불가능한 언어들 간의 공존 및 상호작용을 보증하는 것이 바로 신화이다. 신화로서의 문화모델은 후반부에 들어서면서 인격화된 모델로 전개된다. 인격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하나의 기제가 아니라 새로운 의미를 창조해낼 수 있는 천재성, 달리 말해 광인의 자질을 갖추고 있는 일종의 유기체로 고려된다. 그런데 정보량이 급증하는 어떤 격변의 순간에 이 존재가 적극적으로 개입하는 순간 비로소 폭발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러한 인격적 존재의 개입 방식은 모순되는 것들의 동일시라는 이른바 신화적 세미오시스의 양상을 드러낸다.

『사유하는 구조』의 저자는 로트만 기호학 사상의 중핵을 이와 같은 신화적 세미오시스로 규정하면서 모던(구조주의)도 아니고 모던-이후(후기구조주의)도 아닌, 말하자면 모던-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모험을 감행하는데, 거기서 뜻밖에도 아감벤, 랑시에르, 데리다와 조우한다. 이와 함께 저자는 로트만의 신화 개념이 전복적임을 지속적으로 강조한다. 그런데 모순되는 것들의 동일시, 대립항들의 공존 및 상호작용은 오히려 갈등, 불화, 이견을 중재하는 이데올로기적인 조작이 아니던가? 하나의 신화가 전체를 대표하는 고유명사로 이루어진 것이라면, 이 때 이 고유명사는 모순의 실재를 은폐하는 아버지의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이 물음의 지점에서 저자는 로트만의 사유의 움직임이 문화 혹은 신화에서 역사로 슬며시 옮겨가고 있는 것이 아닌지를 자문한다.

그렇다면, 저자가 이 책에서 탈각된 시간성이라고 부른 폭발의 지점은 어쩌면 도상언어도 분절언어도 아닌, 공간도 시간도 아닌 말하자면 신화적 세미오시스가 작동 중지된 탈신화적 공간이 아니겠는가? 그것은 모던도, 모던-이후도, 그리고 모던-이전도 아닌 사실상 모던의 끝이 아닐까? 기호학이라는 학문에는 고유명사가 기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신화적인 요소가 존재하는데, 흥미롭게도 이 학문은 자신의 고유한 신화를 끊임없이 탈신화화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듯 하다. 『사유하는 구조』의 저자 역시 다른 이름들과는 전혀 다른 로트만이라는 고유명사를 기호학사에 기입하는 동시에 로트만을 넘어서는 로트만을 이야기하고자 하는 의욕을 보인다. 은연중에 드러나는 저자의 해석의 욕망을 엿보는 것은 이 책을 읽는 또 다른 맛이자 재미가 아닐 수 없다.

 

최용호 한국외국어대·프랑스과

필자는 파리10대학에서 소쉬르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긴장도식과 기호모델」등의 논문과 『언어와 시간』, 『소쉬르 언어학과 기호학 사이』(역서)등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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