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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생명과학의 기반이자 힘의 원천”
“한국 생명과학의 기반이자 힘의 원천”
  • 김봉억 기자
  • 승인 2012.03.15 2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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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길생 전 총장이 말하는 ‘건국대 축산대학’

정길생 한국과학기술한림원장. 건국대 축산학과 1기로 건국대 총장을 지냈다. 정 원장은 건국대 축산대학이 지금의 생명과학의 메카로 발전하기까지 핵심 원동력은 “상허 선생의 정신력”이라고 말했다.
정길생 한국과학기술한림원 원장(71세·사진)은 건국대 축산학과 1기로 일본 교토대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73년부터 건국대 축산대학 교수로 재직했다.

건국대 동물자원연구센터 소장과 생명과학연구원장을 지냈고, 2002년 9월부터 2006년 8월까지 건국대 총장을 역임했다. 대한불임학회장, 한국가축번식학회장, 한국축산학회장 등을 지낸 그는 우리나라 번식학계에 난자 생리에 관한 연구를 처음 소개했다. 1982년 국내 최초로 소의 수정란 이식에 성공해 바이오테크놀로지 산업발전의 기폭제가 되기도 했다. 시험관 아기 출산 기술도 그의 연구에서 비롯됐다. 교수로 재직하는 동안 박사 40명, 석사 82명을 배출했다. 건국대축산대학의 역사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고, 발전과정을 이끈 그다.

“1950년대 국민의 97%가 농민이고, 국가생산의 90% 이상이 농업생산이던 시절에 상허 유석창 박사가 진짜 선진국이 되려면 축산업이 발전해야 하고, 축산농업의 사관생도를 기른다는 생각으로 세운 것이 건국대 축산대학 입니다. 다른 곳에서는 웃었어요. 미쳤다고 말이죠.”

건국대 설립자 상허 선생은 1959년 축산대학 설립에 이어 1960년대 초에 농과대학, 농공대학, 지역사회개발 초급대학까지 종합대학에 농업관련 단과대학만 4개를 연이어 세웠다. “상허 선생이 얼마나 집념을 불태웠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상허 선생의 애국심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죠. 국립대도 아닌 사립대에서 말입니다. 동물, 식물, 미생물까지 다룰 수 있는 생명과학 관련 학과가 그 당시에 다 생긴겁니다. 생명과학의 기틀을 세운 것이죠.”

상허 선생이 특히 강조했던 축산대학의 학생들은 파격적인 지원을 받았다. 등록금 전액면제에 전원 기숙사 생활, 옷도 1년에 몇 벌씩 나왔고, 학부를 졸업하면 해외 유학까지 보냈다. 축산학과 1기였던 정길생 전 총장은 “그 혜택을 다 받았던 사람 중에 한 명”이라고 말했다.

1960년대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건국대 축산대학은 산업화가 급속히 진행되면서 위기를 맞는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 위기였어요. 축산대학이나 농과계열 학과를 나와도 취직할때도 없고 신입생도 잘 오지 않고, 입학생 성적도 떨어지고요. 축산대학도 문을 닫아야 한다는 소리가 나올 정도였으니까요.”

산업환경도 어려웠지만 대학 내부의 평가절하가 더 힘들었다. ‘장학금도 끊어라, 통폐합하라’는 압력도 많았는데 시대변화에 맞춰 학문방향을 바꿔 전환점을 마련했다. “옛날처럼 씨뿌리고 수확하고 돼지한테 사료주고 무게 재고 하는 그런 축산 농업에서 벗어나 분자수준에서 인류를 구제할 수 있는 길을 찾자. 그래서 생명공학적 학문으로 전환하게 됐습니다. 1990년대 중반의 일입니다.”

정 전 총장이 소장을 맡았던 건국대 동물자원연구센터가 1990년 당시 한국과학재단의 공학연구센터(ERC)에 선정돼 11년 동안 장기지원을 받으면서 건국대 생명과학의 질을 높이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됐다. 건국대 축산대학의 제2의 전성기가 꽃피기 시작한 것이다.

“설립자인 상허 선생의 정신으로 시작해 축산·농업으로, 최첨단 의학으로 이어져 한국 생명과학의 기반을 닦은 곳이 건국대 입니다. 생명과학이 불모지였을 때 기초부터 시작한 것이 건국대였어요. 건국대가 생명과학을 이끄는 힘의 원천이자 기반이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김봉억 기자 bong@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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