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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나 먼 땅 고려 사람들의 삶과 정체성 … 김치찌개·아리랑 심금 울렸다
머나 먼 땅 고려 사람들의 삶과 정체성 … 김치찌개·아리랑 심금 울렸다
  • 송상용 한림대 명예교수
  • 승인 2012.03.14 1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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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기행_ 우즈베키스탄에서 열이틀

인천을 떠난 아시아나는 우즈베키스탄 사람들로 만원이었다. 교수신문 학술탐방에 나선 우리 20명 말고 한국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8시간 걸려 밤 9시 반 타시켄트에 내렸으나 공항 밖으로 빠져 나오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 보따리 장사들의 전자제품 등 엄청난 짐의 통관 때문이었다.

사마르칸트, 오래된 도시의 윤곽이 뚜렷하게 보인다.

교수신문 우즈베키스탄 학술탐방단은 이영수 대표를 단장으로 중앙아시아 통 박헌렬 교수(중앙대·화학공학)가 기획에 참여했고 우즈베키스탄 과학아카데미 역사연구소 부소장 발레리 한(Valeriy Khan, 고려사람) 박사가 끝까지 동행했다. 절대다수가 교육학자들이었고 인문학자와 기업인이 둘씩 끼였으며 여성이 일곱 분이었다.

우즈베키스탄의 역사

타시켄트의 첫날은 우즈베키스탄국립박물관(구 레닌박물관)에서 시작했다. 길고도 복잡한 우즈베키스탄의 역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였다. 약 4천년 전 청동기시대 초기부터 중앙아시아의 타림분지에 카프카스, 몽골, 페르샤 사람들이 중앙아시아에 들어와 산 흔적이 보인다. 부하라, 사마르칸드가 도시로 발전했고 기원전 5세기에는 박트리아, 소그드, 토하르 왕국들이 자리 잡았다. 중국이 유럽과 명주 무역을 하면서 이 지역은 실크 로드의 거점으로 크게 번창했다.

기원전 327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소그드와 박트리아를 정복했으나 그의 통치는 오래 가지 않았다. 그 다음 이 지역은 오랫동안 페르샤 제국 (파르티아, 사산 왕조)의 통치 아래 있었다. 6세기에 투르크 (돌궐)제국이 세워졌고 중국 (수)와의 전쟁 끝에 동서로 나누어졌다. 8세기에는 아랍 세력 (우마야드, 아바스 왕조)이 아무다리아 강과 시르다리아 강 사이 지역을 차지해 사마니드 왕국으로 이어졌고 이슬람으로 바뀌었다. 13세기 몽골제국 칭기즈 한(칸)의 정복은 이 지역에 극적인 변화를 가져 왔다. 몽골의 잔인한 멸종 정책의 결과 스키타이 (인도 - 페르샤) 원주민은 몽골, 투르크 족으로 교체되었다.

14세기 초 몽골 제국은 쪼개지기 시작했는데 한 부족의 추장 아미르 티무르가 1380년대에 강자로 떠올랐다. 티무르는 이 지역을 확보한 다음 중앙아시아 서쪽, 페르샤, 소아시아, 아랄해 북쪽 초원을 정벌해 큰 제국을 건설했다. 그는 러시아, 인도를 침략했고 중국 (명)에 진출하다가 1405년 죽었다. 티무르는 정복한 나라들의 많은 장인과 학자들을 수도 사마르칸드로 모아 높은 문화를 일구었다. 티무르가 통치하는 동안 거대한 모스크와 궁전이 건설되었다. 그는 또한 인도 등 이웃나라들의 의사, 과학자,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그의 손자 울루그 베그 왕은 천문대를 지은 천문학자였다. 티무르는 페르샤 문학을 육성했지만 투르크말이 새 문학언어로 정착했다. 티무르의 죽음과 함께 둘로 나누어져 싸우다 아랄해 북쪽의 우즈벡 유목민족에게 제압당했다.

19세기 초부터 러시아인들이 중앙아시아에 이주하기 시작했고 1865년 코칸드, 히바, 부하라 한국들은 제정 러시아의 보호령이 되었다. 혁명후 우즈베키스탄은 자치국 우즈벡소비에트사회주의공화국으로 소련의 일부가 되었다. 1991년 소련이 무너짐에 따라 우즈베키스탄은 8월 31일 독립을 선포했다.

실크 로드의 어제와 오늘

저녁에는 오페라 발레극장에서 베르디가 작곡한 오페라 오셀로를 감상했다. 우즈벡말에 자막이 없어 대사는 즐길 수 없었으나 예술 수준은 높았다. 소련이 남긴 좋은 유산 같았다. 이튿날 아침 일찍 버스로 답사에 나섰다. 목화밭이 끝없이 이어지는 길을 서남쪽으로 6시간 달려 사마르칸드에 도착했다. 실크 로드의 중간 기착지인 사마르칸드는 ‘동방의 로마‘로 불렸고 티무르는 ’푸른 도시‘라는 별명을 주었다. 타시켄트와 대조적인 구 시가의 한복판에 있는 카밀라 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전통식 건물이었다. 저녁에는 엘 메로시극장에서 전통무용을 즐겼다. 알찬 공연이었는데 인도, 아랍과는 다른 춤이었다. 촌놈(전남)대에서 강의도 했다는 압둘라예프 고문(교육학박사)이 알아 듣기 어려운 한국말로 환영 인사를 했다.

실크로드 중간 기착지 사마르칸드는 '동방의 로마'로 불렸다. 웅장하고 아름다운 아프로시압 모스크가 낯선 순례자들을 환대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아프로시압(사마르칸드의 옛 이름) 모스크를 먼저 찾았다. 20세기에 발견되었다는 벽화는 깃털 모자를 쓴 두 고구려 사신이 잔치에 참가하고 있는 것이 보여 유명해졌다. 2004년 인하대 학술조사단이 발견한 것이다. 울루그 베그 천문대도 놓칠 수 없었다. 지하 18 미터에서 낮에도 관측한 것이 인상적이었다. 옆에 세운 울루그 베그 박물관에서는 천체 관측 기구 혼천의가 관심을 끌었다. 샤히 진다 묘지, 성 다니엘 영묘, 레기스탄 광장, 비하눔 영묘, 마드라사(신학교)를 둘러 보았다. 카페트 공장, 시장도 들렀다. 사흘이 걸린다는 사마르칸드를 하루에 서둘러 끝냈다.

사마르칸드를 떠난 버스는 교외의 알 부하리(810-870)의 영묘에 들렀다. 알 부하리는 메카에 순례를 다녀온 뒤 예언자 무하마드의 어록을 수집해 정리한 가장 위대한 신학자로 ‘이슬람의 사도 바울’이라 할

노을빛을 배경으로 서 있는 모스크의 위용이 이방인을 압도하는 도시.
만하다. 부하라까지는 6시간이 걸렸다. 버스 안에서 박성래 교수(외국어대·과학사)가 8세기 이 지역에서 활약한 고선지(高仙芝, ? - 756)에 관해 강의했다. 고선지는 고구려가 망한 뒤 중국 변방으로 쫓겨난 유민의 아들로 당의 장군이 되었고 네 차례나 타시켄트, 사마르칸드 등 서역을 정벌해 이름을 날렸다. 그러나 그는 751년 탈라스 강변에서 아랍군에 크게 패했고 안록산의 난에 모함을 받아 처형 당하는 비운의 주인공이 되었다. 탈라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당의 지장(제지기술자)이 사마르칸드에 제지공장을 세웠다. 그 뒤 종이 만드는 기술은 바그다드, 카이로를 거쳐 아랍 지배 아래 있던 스페인에 전해졌고 중세 유럽에 퍼졌다. 고선지가 중요한 동양기술을 서양에 전한 것이다.

4시간만에 도착한 부하라는 사마르칸드와 함께 실크 로드의 거점 도시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다. 14세기에 이슬람 신비주의 수피가 성했던 곳이었다. 그 대표라 할 수 있는 낙시반디의 영묘, 초르 바크르 모스크, 초르 미노르 모스크, 에미르의 하궁 등을 구경했다. 부하라는 아랍 최고의 철학자, 과학자, 의사 이븐 시나(라틴 이름 아비케나, 980 - 1037)가 태어난 곳이다. ‘아랍의 아리스토텔레스’로 불리는 이븐 시나는 페르샤 사람으로 서양철학사, 서양과학사에서도 빼놓을 수 없는 거성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활동하다가 이란의 하마단에 묻혔는데 박물관은 너무 초라해 섭섭했다. 이란 정부는 2004년 유네스코와 함께 과학기술윤리 분야에 주는 아비케나상이라는 큰 상을 제정했는데 나는 세계과학기술윤리위원회(COMEST) 위원으로 있을 때 심사위원을 지낸 인연이 있어 부하라 방문이 각별히 기뻤다.

부하라를 떠난 우리는 초원(스텝)과 사막을 종일 달려 히바로 갔다. 사막을 가로지르는 도로는 고열을 견디지 못해 울퉁불퉁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 옆으로 새 실크 로드 프로젝트로 콩크리트 고속도로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놀랍게도 한국의 포스코가 맡아 독일 회사에 하청을 주고 있었다. 사막 한가운데 기념비가 있기에 내려가 보았다. 1999년 그 곳에서 과격파 테러에 희생된 세 병사를 기념하는 건조물이었다. 점심은 도시락을 먹고 오아시스에 들려 목을 추겼다. 아무르다리아강에 내려가 건너편 투르크메니스탄을 바라보기도 했다. 이 지역은 호레즘주로 유명한 아랍 수학자 알 화리즈미(780 - 850)와 과학자 알 비루니(973 - 1040)가 태어난 곳이다. 기원전 4세기 호레즘 왕궁 유적이 있었다. 토성은 사막 가운데 방치되어 있었다. 이스라엘의 마사다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바는 카라카팍스탄 자치공화국에 속해 있다. 새벽에 성을 보러 나갔다. 살을 에이는 영하 15도 강추위에 성 안에는 기념품 가게들이 유일한 관광객인 우리들을 붙들었다.

아야즈 칼라의 유르타(몽골 천막) 캠프에 닿았다. 사막에서 낙타를 타고 유르타에 하루 묵을 계획이었다. 그러나 추운 겨울에 문제가 일어날 수 있다고 해 점심만 먹고 펠메니(만두) 도시락을 받아 히바로 돌아왔다. 이튿날 아침 우르겐치 공항에 나갔다. 타시켄트 공항에 눈이 쌓여 비행기가 내릴 수가 없단다. 호텔로 돌아와 시장 구경을 하고 패션 쇼도 즐기며 시간을 보내다가 밤에야 우즈벡 에어웨이즈를 타고 타시켄트 공항에 내린 것은 자정 가까워서였다. 발레 공연을 보려고 표를 사 놓았는데 휴지가 되어 억울했다.

중앙아시아의 고려 사람들

르 그랑드 플라자호텔에서 쉬고 마지막 이틀 타시켄트를 돌아보았다. 우선 고려인문화협회를 찾았다. 넓은 터에 자리 잡은 회관은 고려 사람들의 사진과 그림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바짐 리가이 협회 고문(체조 챔피언), 김용택 (블라지미르 킴) 공훈기자, 작가, 비체슬라브 이 시인 등 동포 지도자들이 우리를 맞았다. 가까운데 있는 한국대사관 부속 타시켄트 한국교육원 조철수 원장도 와 있었다. 고려 사람들은 1937년 우즈베키스탄에 올 때 인쇄기를 갖고 와 신문 <레닌기치>를 만들었는데 지금은 <고려일보>로 제호를 바꿔 이곳에서 내고 있다. 고려사람 홈페이지도 운영하고 있다.

나이든 고려인들이 아리랑을 부른다. 고향의 향기가 아스라하다.

이어 교외에 있는 폴리타델 농장을 방문했다. 러시아시대 고려 사람들의 집단농장으로 시작한 곳이다. 자랑스런 한국인의 자부심을 가지라는 강호봉 전 서울시 교육회 의장의 인사를 듣고 화려한 한복으로 단장한 고려 여성들의 노래와 춤 공연이 있었다. 반 이상이 70대를 넘긴 할머니들이었다. 합창 돌아보지 마라. 봄의 고향, 세월아 네월아, 과수원집, 88 올림픽 노래, 사랑으로, 카추샤와 독창 희망초에 곱추춤, 부채춤, 날 좀 보소, 우즈벡 춤이 이어졌고 마지막에는 우리도 어울려 덩실덩실 춤을 추었다. 농장에서 만든 재료로 준비한 두부, 나물, 김치, 된장찌게 등 때 묻지 않은 고려 음식은 맛있었다. 김용화 (슬라바 킴)씨는 다시 오면 자기 차로 안내하겠다고 작별을 아쉬워했다.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는 마침 타시켄트에 중앙아시아 음악 연구차 와 있던 김보희 교수(한양대 ? 작곡, 인류학)의 소련시대 고려 음악에 관한 특강을 들었다. 어랑 타령, 나운규 아리랑, 밀양아리랑, 용천아리랑으로 전개된 역사가 흥미로웠다.

우리와 여행을 함께 한 발레리 한 박사는 19세기에 함경도에서 연해주(Primorskiy)로 이주했다가 1937년 우즈베키스탄으로 강제 이주한 고려사람 3세다. 한 박사는 소련시대 문화대학 총장의 아들로 타시켄트에서 대학을 마치고 모스크바국립대학에서 수석을 차지해 고대 논리학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철학자다. 타시켄트로 돌아온 뒤 인류학, 역사학으로 관심을 넓힌 그는 고려사람 전문가가 되어 한국, 북한, 러시아, 미국, 유럽 학회에서 많은 초청 발표를 했다. 한국말은 꽤 알아들으나 말은 잘 못하고 유창한 영어를 구사한다. 차 안에서 우리의 공통 배경인 철학부터 시작해 고려 사람에 관한 얘기를 많이 나누었다. 한국에서 발표한 논문들도 받았다.

1887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중앙아시아에 고려 사람은 24명이 살았다. 연해주의 고려 사람들을 일본 스파이로 본 스탈린의 명령으로 강제로 중앙아시아에 던져진 고려 사람들은 카자흐스탄 10만, 우즈베키스탄 20만이었다. 대다수가 농민인 고려 사람들은 질 좋은 조선 쌀 재배에 큰 성공을 거두었다. 김만삼은 1942년 카자흐스탄 집단농장에서 쌀 소출에서 세계기록을 세웠으며 고려 사람들은 목화, 밀, 사탕수수, 감자, 수박에서도 모두 수확 기록을 깨뜨렸다. 뿐만 아니라 고려 사람들은 부지런하고 교육열이 높아 좋은 러시아 학교에서 다른 민족보다 두각을 나타냈고 사회 각 분야에 널리 진출했다. 중앙아시아에서 고려인들의 성공은 여러 민족들 가운데 가장 두드러졌고 일본, 중국, 미국의 교포들도 이루지 못한 놀라운 현상이다.

고려인들은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들에서 부총리, 국회부의장, 장관, 차관, 헌법재판소장, 시장 등을 배출했고 소련의 영웅, 사회주의 영웅, 국가의 주요 상 수상자들을 냈다. 소련과 공화국들의 과학아카데미 회원이 3명이고 대학 총장, 부총장, 교장, 교수, 연구소장이 여럿이며 박사만 해도 700명이나 된다. 대기업 사장, 은행 총재, 농장장, 국가올림픽위원장, 각종 체육회장들도 눈에 띈다. 저명한 스포츠 챔피언, 작가, 작곡가, 화가, 오페라 가수, 발레 무용수들도 많다. 비탈리 펜(변, Vitaliy Fen) 주한 우즈베키스탄 대사도 고려 사람이다.

고려 사람들 사회가 마냥 밝은 것만은 아니다. 인구가 계속 줄고 있어 우즈베키스탄의 고려 사람은 15만이 안 된다. 우즈백 사람들은 대여섯을 낳는데 고려 사람들은 하나만 낳는다. 중앙아시아는 독립 이후 민족주의가 강해져 고려 사람들의 신분 상승도 어렵게 되었다. 제2의 고향 연해주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다. 농촌에는 노인들만 남고 젊은이들은 러시아, 미국, 캐나다, 유럽, 한국으로 빠져 나간다. 고려 사람 사회는 아직도 공동체 성격이 강하지만 젊은 세대는 개인주의 경향이 커져 러시아, 유럽 사람들과 편하게 지내게 되었다. 한국의 놀라운 경제발전은 고려 사람들의 지위 향상에 도움이 되었다. 한국 기업의 진출도 눈부시다. 냉장고, 가전제품, 휴대전화. 자동차는 한국 제품이 휩쓸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에서 한국의 영향은 러시아, 미국, 이슬람권. EU 다음으로 높다. 한국 기업이 중앙아시아에서 자리 잡는 데는 고려 사람들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는 현지인들을 많이 채용하면서 고려 사람들은 쓰지 않는다니 문제다.

쓸쓸한 도시. 겨울의 한기가 가득하다.

고려 사람들은 뿌리를 중요하게 여기지만 중앙아시아를 영원히 살 조국으로 생각한다. 2차 대전이 끝나자 고향으로 모두 돌아간 타타르족과는 좋은 대조다. 젊은 사람들은 자신을 러시아 사람으로 여기는 경향도 있다. 고려 사람들의 2중정체성은 이해해야 한다. 한국대사관, 한국 기업, 한국 종교인들은 고려 사람들이 한국사람 같이 행동하기를 기대하고 강요하기까지 한다고 한 박사는 불만을 털어 놓는다. 안 될 일이다. 같은 핏줄이라도 백년 이상을 다른 환경에서 살았는데 어떻게 같을 수 있을까 ? 우리는 고려 사람들의 ‘유라시아 고려문화’를 이해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21년 전 한 박사는 한반도 통일 문제를 과도기의 변증법 이론의 관점에서 다룬 글을 남북 대사관에 보냈다가 남에서는 친북, 북에서는 친남이라고 거부당했다는 얘기를 썼다. 그는 남북이 승자 - 패자 패러다임을 버려야 한다고 하면서 전 세계에 흩어진 7백만 디아스포라(diaspora, 이산동포들)가 통일협상을 중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타시켄트를 떠나며

마지막 날 우리는 독립기념광장(구 레닌광장, 붉은 광장)을 거닐었다. ‘슬픈 어머니’ 동상에 새겨진 “아들아, 너는 내 마음 속에 늘 있다.”는 구절이 가슴을 찡하게 했다. 2차 대전에서 중앙아시아 다섯 나라 사람들 240만이 죽었다고 한다. 아버지, 남편, 아들을 다 잃은 여인들이 많았다. 레닌 동상이 있던 자리에는 ‘행복한 어머니’ 동상이 서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의 밝은 미래를 상징하는 것이다. 멀지 않은 곳에 1966년 4월 26일 일어난 지진 기념비가 있다. 목조건물들이라 사상자는 많지 않았지만 폐허가 된 타시켄트는 완전한 새 도시로 다시 태어났다. 넓은 길에 공원이 많아 러시아 도시 같은 인상을 준다.

가는 곳마다 우즈벡 사람 가이드가 나왔는데 한국에 유학했거나 취업했던 사람들이라지만 완벽한 한국말이 놀라웠다. 타시켄트를 맡은 아자마트는 우즈베키스탄대학 신문방송학과를 나와 중앙대 영문과에 유학한 프리랜서였고 사마르칸드의 베기는 사마르칸드외국어대학 한국어과 출신으로 한림대에서 한국어 연수를 했다. 우즈벡말과 한국말은 우랄 - 알타이 어족이라 구조가 거의 같다고 하나 비슷한 말은 드물어 마할 (마을) 정도가 눈에 띄었다. 우즈벡말이 공식 언어지만 아직도 러시아말은 널리 쓰이고 있고 호레즘주에는 타지크 사람이 많이 살아 타지크말(페르샤계)도 통용된다고 했다. 우리 여행사 여사장은 아제르바이잔 출신이고 부장은 아르메니아 사람(그리스도교도)이어서 다민족사회를 실감했다. 한 박사, 가이드와 함께 넷이 어울릴 때는 러시아말을 썼다.

우즈베키스탄은 이슬람 88 퍼센트, 러시아정교 9 퍼센트라고 한다. 그러나 이슬람은 국교가 아닐 뿐 아니라 종교 색채는 아주 약해 보였다. 중앙아시아는 고대에 조로아스터교에서 시작해 불교, 네스토리우스파 그리스도교(경교)를 거쳐 이슬람으로 넘어갔다. 러시아 지배를 백년 이상 받았고 소비에트시대의 무신론 정책 때문인 것 같다. 샤마니즘 영향도 뿌리 깊다고 한다. 한 가이드는 (쿠란의 가르침에 반대로) 술을 마시고 거짓말도 잘 한다고 거침없이 말했다.

음식은 아랍, 인도의 영향을 받은 것 같은데 양념을 강하게 쓰지 않아 우리 입맛에 잘 맞는다. 돼지고기는 안 먹는 듯하고 양고기가 가장 중요하지만 쇠고기, 닭고기도 많이 소비된다. 고려 사람들에게 배운 개고기가 인기이고 타타르 사람들 영향인지 말고기도 잘 먹는다. 바다가 없으니까 민물고기를 먹는데 흙냄새가 난다고 즐기지는 않는 모양이다. 생선 전문 식당은 드물었다. 전형적인 식단은 채소 네 가지에 수프가 나오고 메인 디시로 끝난다, 요구르트에 찍어 먹는 푸른 무, 고수 (중국어: 샹차이, corriander)에 버무린 샐러드, 플로브 (볶음밥), 양고기 탄두리 케밥, 샤실릭 (양고기 꼬치구이)이 좋았다. 옛날에 포도주가 유명했다는데 이슬람이 들어오면서 포도나무를 다 뽑아버렸다고 한다. 러시아가 들어온 다음 포도를 다시 심었다지만 포도주는 실망이었다. 러시아가 가져온 맥주와 보드카는 질이 높다. 가장 많이 마시는 술이 맥주라고 한다. 코피는 인스탄트를 마시고 홍차는 수준급이다.

마지막 날에는 시장에 들러 모두 맛있는 빵 논(러시아말: 레포시카)을 선물로 사 들고 저녁을 먹은 다음 공항으로 나갔다. 한 박사의 부인 노나(하바로프스크 출신 고려 사람)와 딸 올가가 함께 했다. 올가는 철학, 인류학, 미술사를 전공한 재원인데 3월부터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영화를 공부한다는 반가운 소식이다. 비행기 옆 자리에 인천 플라스틱공장에서 4년째 일하고 있다는 고려 사람 아나톨리 김이 앉았다. 딸도 부산에서 일한다고 했다. 보드카를 시켜 함께 마셨는데 깨 보니 인천이었다.

송상용 교수

 

글 송상용 한림대 명예교수·한국과학기술한림원 종신회원

사진 장언효 국민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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