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24-04-25 11:15 (목)
섬김의 대상으로 군림한 經典 … 孔子는 파격적으로 접근
섬김의 대상으로 군림한 經典 … 孔子는 파격적으로 접근
  • 교수신문
  • 승인 2012.03.12 18:5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동서양의 인문교육과 고전읽기_ ❶ 중국에서 古典은 무엇이었나(동양편)
고전은 ‘시간의 잔혹함 속에도 무수한 사람들의 검증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책’일까,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일까. 대학에서 고전의 활용방안을 지성사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논쟁의 불을 지피고자 합니다.

10가지 동일한 주제를 놓고,  동·서양 고전의 역사를 번갈아 싣습니다. 동양은 김월회 서울대 교수(중어중문학과)가 중국의 고전교육 역사를 중심으로 논지를 이어가고, 서양은 안재원 서울대 HK연구교수(고전라틴문학)가 로마를 중심으로 뻗어나간 서양 고전의 역사를 따라갑니다.

 

古典이란 표현이 자리 잡기 전, 중국에서 ‘권위 있는 일급의 책’을 지시하는 말은 경전이었다. 글자의 형태상 죽간이나 목간을 끈으로 엮은 물건 곧 책 일반을 가리켰을 것으로 추정되는 ‘經’자는 늦어도 공자의 시대, 그러니까 기원전 6세기 무렵에 오면 권력의 위엄을 물씬 풍기게 된다. 莊子의 증언에 의하면, 예를 배우고자 노자를 찾은 공자는 이렇게 자신을 소개했다.

“저는 『시(詩)』와 『서(書)』, 『예(禮)』, 『악(樂)』, 『역(易)』, 『춘추(春秋)』의 六經을 공부해왔습니다.” - 장자, <天運)>

여기서 공자가 일찍부터 닦아왔다는 여섯 가지의 경은 官府에 소장돼 있던 서적이었다. 공자의 시대 직전까지만 해도 모든 학문은 왕실과 관청에 있었다. 지식이 권력의 고갱이었기에 그것은 관부 밖으로 흘러나가지 못하도록 철저히 통제됐고, 그 당연한 귀결로 민간엔 책이 있을 수 없었다. 하여 경은 애초부터 관부에 보관된 서적을 그저 ‘가치중립적’으로 지시하는 표현이 될 수 없었다. 여기에 ‘가치가 큰 책(大冊)’이라는 뜻으로 고안된 ‘典’자가 덧붙여졌으니, 경전은 일급의 권위가 부여된 책을 가리키기에 부족함이 없는 표현이었다.

‘책의 위계화’ 고등문명의 공통분모

덕분에 단순히 경전을 존중하는 차원을 넘어 개인적, 사회적 차원 모두에서 그것을 종주로 받들어 섬기는 태도가 일찍부터 형성됐다. 훗날 ‘宗經’이라는 말로 갈무리된 이러한 태도는 “내 삶은 육경의 주석이다” 식의 극단까지 치닫는다. 다시 말해 “경전이 나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경전을 위해 내가 존재한다”는 관점이 신봉됐다.

신의 예속으로부터 인간의 해방을 얻어낸 근대인의 머리로는 도통 이해할 수 없는 사고방식처럼 보인다. 그러나 육경 등의 경전이 “중화 2천여 년의 역사를 만들어냈다”는 진단이 꽤 유효한 것을 보면, ‘종경’은 도외시하거나 만만하게 덤벼들 수 있는 사유가 아니었던 듯싶다.

아무튼 경전이 떠받들고 섬기는 대상으로 여겨졌다면, 경전에 속하는 텍스트도 위로부터 정해져서 아래로 제공됐음은 익히 예상할 수 있는 양상. 전근대시기 중국에서 경전은 육경에서 五經으로, 다시 七經, 九經 식으로 들쭉날쭉하다가 남송 무렵에 와서 十三經으로 갈무리됐다.

그렇다고 고정된 것은 아니었다. 그 후로도 왕조나 군주의 필요에 따라 칠경부터 十二經까지 두루 재편됐고, 어떤 텍스트를 포함시키고 또 배제할 것인가의 문제도 전적으로 ‘윗사람들’의 뜻에 의해 결정됐다.

공부를 기반으로 사회 특히 정관계에 진출하고자 했던 이들에게 경전은 주어진 대로 열심히 익혀야 할 대상이었지, 선택적으로 공부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었다. 선택은 경전이 아니면서 예부터 있어온 책들의 경우에나 가능했다고 할까. 예컨대 제자백가들의 책으로 알려진 텍스트나 불교의 텍스트 등은 제법 골라 읽는 재미를 느끼게 해줬다. 

그렇다고 선택적 읽기가 가능한 부류의 책들을 일러 ‘고전’이라고 명명하기에는 여전히 조심스럽다. ‘전’ 자가 품고 있는 권위가, ‘고전’이라고 조어한다고 하여 사라지지도 않거니와, 전근대시기엔 그러한 책들이 ‘좋은 책 혹은 모범이 되는 텍스트’를 지칭하는 가치중립적인 책으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냥 무난하게 ‘고적(古籍, 옛 책)’ 정도의 표현으로 묶을 수 있는 그 책들은, 서양의 역사에처럼 脫세속적인 권위를 지닌 경전(canon)과의 관계에 따라 그 밑에 배속되거나 내쳐지는 방식으로 위계화 돼 있었다. 말이 ‘선택’이지, 경전이 아닌 책들조차 읽는 이의 의지나 판단에 따라 읽은 것만은 아니라는 소리다.

그런데 책들이 경전을 정점으로 위계적으로 배치되는 양상은 비단 고대 중국에만 있던 특이함이 아니었다. 서구에서 ‘고전(liber classicus)’이 경전의 억압으로부터 자유를 찾게 된 계몽주의 시대 전까지는 『성경』이란 정전 밑에 놓였던 것처럼(교수신문 634호 ‘고전 명칭 경쟁’ 참조) ‘책들의 위계화’는 소위 ‘고등문명’에서 공통적으로 목도되는 현상이다.

‘古典은 섬겨야한다’는 강박 벗어나야

굳이 중국만의 특이점을 ‘억지로’ 찾는다면 공자의 경전 읽기 양상 정도일 것이다. 『시』, 『서』, 『역』과 같은 텍스트가 경전이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장본인이 바로 공자라면, 그의 경전 읽기는 응당 ‘종경’의 표본이어야 자연스럽다.

그러나 이러한 논리적 판단과는 달리 공자는 경전을 섬김의 대상으로 설정한 적이 없었다. 도리어 “여섯 가지의 학예에서 노닌다.(游於藝)”고 말함으로써, 그는 경전을 ‘노님(游)’의 대상으로 설정하는 ‘파격’을 선보였다. 그가 언급한 여섯 가지의 학예(六藝)에는 『예』와 『악』 같은 텍스트를 공부하는 행위가 들어 있었으니, 결국 경전을 섬겨야 한다는 지향과 그것에 얽매이지 말라는 상반된 지향이 공자라는 하나의 원천으로부터 비롯된 셈이다.

바로 이 점이 ‘지금-여기’의 고전 읽기 현장으로 끌어와야 하는 바이다. 고전은 진리와 교훈을 주기에 고전이라는 관점은 현대판 ‘종경’의 양태이다. 여전히 유효한 관점이지만 그건 고전 읽기의 한 날개일 뿐이다. 고전 읽기를 통해 21세기의 창공을 가로지르며 날려면 또 하나의 날개가 있어야 한다.

이름하여 “고전에서 노닐기!” 그리하여 ‘놀이하는 인간(homo ludens)’처럼 새로운 문명 창출의 동력을 고전에서 길어내는 것이 필요하다. 지금이라고 하여 고전이 ‘좋은 책 혹은 모범이 되는 텍스트’를 의미하는 탈역사적이고 가치중립적인 책인 것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김월회 서울대·중어중문학과

서울대에서 박사를 했다.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선임연구원을 지냈다. 중국근대학술사 전공으로 「동태적 인문으로서의 통합적 학문」, 『살아 움직이는 동양고전들』 등 다수의 논저가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