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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성찰없는 역사의 보복
[문화비평] 성찰없는 역사의 보복
  • 김진호 목사
  • 승인 2002.07.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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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01 00:00:00
김진호 / 목사·당대비평 편집위원

헬리콥터에서 찍은 대구월드컵 경기장을 보며, 어떤 이는 ‘빨간고추로 가득한 소쿠리’가 떠올랐다고 했다. 대학로, 세종로 네거리, 시청 앞 광장 등, ‘빨간고추’는 대형 스크린이 있는 광장이면 어디에나 가득히 널려 있었다.
6월 4일 밤, 일곱 명이 전부인 관객과 더불어 영화 관람을 마친 나는 광화문 도로를 활보하며 환호하는, 무수한 붉은 옷 사람들의 대열을 보며 십오 년 전의 6월을 떠올렸다. 당시 어떤 이들에게는 거리를 활보하는 우리가 ‘빨간 옷’을 입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10일 저녁 골방에서 TV를 보며 다시 한번 십오 년 전 6월 10일이 연상됐다.
물론 “독재타도!” 대신 “대∼한민국!”이 열호되고 있다는 것과, 공공성의 상징인 법에 대한 단호한 부정이 집회장 뒷정리와 선거 참여 독려 등 공공성의 적극적인 긍정으로 바뀌었다는 것은 그 두 사건이 그리 닮지 않았다는 것을 말해준다.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선한 우리’와 ‘악한 저들’만 존재하는 세상, 2도 색조의 세계만 실재하는 모습은 두 사건 사이의 결정적인 유사성이 아닐까. 15년을 전후로 하는 도시의 ‘광장’엔 ‘회색인’, 아니 총천연색의 다색인들은 실재하지 않는 존재, 곧 비존재인 것이다. 6월 4일, 영화와 대 폴란드 경기가 비슷하게 끝난 시각, 광화문에 있었음에도 나는 그 시공간의 외부에 있는, 단지 ‘투명인간’에 불과했다.
바야흐로 ‘16강 담론’과 더불어 한국은 총력전 체제에 돌입했다. 명시적이든 잠재적이든, 그것은 ‘빨간색’의 비주얼한 기표로서 표상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빨간 셔츠 위의 “Be the Reds”라는 자극적인 문구에도 불구하고, 딱히 그것이 빨간색이어야 할 이유는 없다는 데 있다. 무슨 색이든, ‘선한 우리’에 속하는 각각의 사람을 단지 하나의 색깔로서 ‘전체화’한다는 점이 더욱 중요하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는 지금 단색의 상상된 공동체인 ‘국민’으로 호명되고 있다.
한데 그것은 동시에 ‘타자’에 대한 ‘벽 쌓기’라는 점을 유념해야 한다. 그 가운데서 어떤 타자는 철저한 무관심의 대상이 된다. 피버노바를 꿰매면서 망가진 제3세계의 아이들이 그렇고, 외국 손님들의 미관을 해칠까봐 생활터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그렇고, 단군 이래 최대의 국가적 행사를 위해 기본 권리인 노동쟁의권을 제약당한 사람들…이 그렇다.
이렇게 우리의 배타적 아성이 견고하게 구축하는 동안, 역설적이게도 우리는 세계와 더욱 긴밀한 관계의 망 속으로 얽혀 들어가고 있다. TV를 통해 같은 장면을 전 세계가 함께 시청한다. 하나의 룰에 의해 진행되는 하나의 스포츠를 시청하면서 세계인은 동일한 하나의 규칙에 순응한다.
축구라는 야수적 남성성의 스포츠쉽에 의해 세계인의 신체가 훈육되며, 거기에 긴밀히 접속된 자본주의 정신에 삶의 방식 전체가 구성된다. 우리는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축구라는 상품의 소비자로서, 의지와 욕망까지 모두 잠식당한 존재가 되었다.
요컨대 월드컵이라는 스펙터클은 바로 이러한 국가주의적 국민과 자본주의적 소비자로 우리를 호명한다. 거기엔 실재의 ‘나’는 없다. 오직 국가주의와 자본주의에 의해 규율된 사이버스페이스 속에서 허무하게 유영하는 ‘가상의 나’만 있을 뿐이다.
그런 점에서 국가와 자본의 연대를 조직해내는 국제축구연맹은 네그리적 의미의 ‘네크워크 권력’으로서의 ‘제국’의 한 실체라고 하는, 한 역사학자의 말은 내게 깊은 깨달음이 됐다.
몇 시간 후에 나는 투표하러 갈 예정이다. ‘나쁜 권력’을 응징하기 위해 자신이 ‘좋은 권력’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주장 일색인 듯이 보이는 그 권력 게임에 참여하러 가야 한다. 내 생각에는 좋은 권력을 자부하는 사람들은 아마도 네트워크 권력의 은연중 침투하는 유연한 공세에 벌써 세뇌된 듯이 보인다. 하나의 유니-폼을 입은, 단일대오의 ‘한국민’으로 세계화에 성공한 경쟁력 있는 이른바 지구시민들의 사회를 이루자는 유토피아적 꿈이 모든 선거 담론의 기본 정신을 이루고 있지 않은가. 아무도 그 유토피아가 국가와 자본에 의해 규율된 신체와 함량미달인 이른바 ‘불량감자’들로 나뉜 세상이라는 걸 전제하지 않는 듯 하다.
그런 인식론 위에서 게임이 구성되었고, 나는 다른 도리 없이 그 게임에 참여해야 한다. 현재로선 그 외부의 공간은 없어 보인다.
성찰 부재의 15년은 이렇게 ‘지연된 80년대’라는 독성 심한 부메랑이 되어 우리에게 되돌아왔다. 역사의 보복이란 이런 것인가 보다.
그러니 이제 월드컵과 지방선거라는, 단색 이분법적 게임의 법칙으로 표상되는 2002년을 성찰하기 위해 고통스런 숙고를 시작할 시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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