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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_ 너희가 촛불을 아느냐
원로칼럼_ 너희가 촛불을 아느냐
  • 이가림 인하대 명예교수·불문학(시인)
  • 승인 2012.03.12 08: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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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가림 인하대 명예교수·불문학
촛불은 흔히 연꽃에 비유되곤 하는 명상적 대상이다. 불교의 상징인 연꽃이 더럽고 추하게 보이는 진흙탕에 살지만 그 더러움을 조금도 자신의 꽃이나 잎에 묻히지 않는(處染常淨) 것처럼, 그리고 그것을 보고 있으면 절로 마음이 온화해지고 즐거워지는(面相喜怡) 심리적 안정을 느끼게 하는 것처럼, 촛불 역시 그러한 기능을 지닌 특이한 불이라 할 수 있다.

촛불, 하면 얼른 떠오르는 시인으로는 필자의 고교시절 은사이신 신석정 선생이 계시지만, 여기서는 최근에 쓴 필자의 졸시「촛불소묘 · 5」를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잠깐 소개해 볼까 한다. “뼈도/ 재도 남기지 않는/ 절대소멸의 꽃// 빛으로 태어나/ 빛으로 죽는/ 환한 생애// 그에겐/ 한마디 유언조차/ 사치일 뿐”

구태여 해설이 필요치 않을 정도로, 촛불이 지닌 깨끗함과 순수한 희생의 속성을 짧게 노래한 시다. 필자는 “빛으로 태어나/ 빛으로 죽는/ 환한 생애”의 상징으로 촛불을 묘사하는 데 머물렀으나, 이보다 훨씬 더 촛불에 대해 깊이 탐구하고 다각도로 몽상한 시인 철학자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20세기 최대의 ‘상상력의 형이상학’을 수립했다는 평가를 받는 가스통 바슐라르(1882~1962)다. 

우리나라 최초의 바슐라르 번역서라는 의미를 갖는『촛불의 미학』을 필자가 옮긴 것은 1973년이다. 원 텍스트를 제대로 꼼꼼히 정독하고 분석해 보겠다는 젊은 의욕으로 번역에 손을 댔던 것인데, 그런대로 가독성 면에서 비교적 유려하다는 독자들의 후한 평가를 받기도 했다. 그 역서의 평판 덕분에, 필자가 무슨 촛불 전문가라도 되는 양 글을 청탁받거나 심지어 강연을 요청받기도 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른다. 

바슐라르에 의하면, 불이면서도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 촛불이다. 촛불은 처음부터 저 혼자서 타며 스스로 연료를 마련하기 때문에 다 닳아 없어질 때까지 고독하게 같은 불꽃으로 탄다. 일반적으로 불이 다른 것과 융합하려고 하는 데 반해, 촛불은 결코 합치려고 하지 않는다. 혼자 타면서 혼자 꿈꾸는 것, 이것은 인간 본래의 실존적 운명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촛불은 그 자체의 모습만을 놓고 관찰해 보면, 불꽃이 붉은 빛과 흰 빛으로 이뤄져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흰 빛은 뿌리 쪽의 파란 빛과 연결돼 있는 사회의 부패와 권력을 일소하려는 것으로 볼 수 있으며, 붉은 빛은 심지와 연결돼 있는 모든 불순물과 더러움으로 볼 수 있다. 그리하여 이 둘의 투쟁이 하나의 변증법을 이루면서 탄다. 즉 촛불은 흰 빛의 상승과 붉은 빛의 하강, 가치(價値)와 반가치(反價値)가 싸우는 결투장인 것이다.

이렇듯 촛불을 몽상의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면, 그 의미는 비근한 사물의 영역을 넘어 심오한 철학적 사유의 표상으로까지 발전하게 된다. 여기에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하는 촛불시위 같은 정치적, 사회적 의미까지 보태지게 되면, 촛불은 그야말로 역사적 현상의 움직임을 드러내는 계시적 지표가 되기도 한다.  

단 하룻밤이라도 전등과 TV를 끈 채 촛불을 켜고 지내본 적이 있는 사람은 촛불이 가져다주는 ‘느린 삶’의 의미와 가치, 그리고 편안한 휴식과 행복의 맛이 어떤 것인지 느꼈을 것이다. 이런 ‘느린 삶’의 즐거움에 빠져 살 수 없도록 처형된 세상 속에서, 모두가 다 한가로운 촛불族이 될 수는 없다. 하지만 한 달에 두세 번 쯤 촛불 아래에서 아이들에게 동화책을 읽어주고, 밥을 함께 먹고, 수다를 떨고, 일기를 쓰는 최소한의 삶의 권리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오늘 밤 당장 전등과 TV, 컴퓨터와 휴대폰을 끄고 빼앗겼던 나와 가족의 시간을 되찾자.

이가림 인하대 명예교수·불문학(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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