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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비평] ‘붉은 악마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문화비평] ‘붉은 악마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 홍덕률 대구대
  • 승인 2002.07.01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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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01 00:00:00

홍덕률/대구대·사회학

월드컵이 끝났다. 이제 무슨 재미로 사냐고 걱정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운동에는 통 소질이 없는 내게도 정말 재미있는 한 달이었다. 축구도 축구지만 붉은 악마와 7백만의 거리응원은 세계적인 뉴스거리였다. 태극기로 원피스를 만들어 입은 혁명적인 패션에 우선 놀랐고, 7백만이 거리에 쏟아져 나온 그 열기에 놀랐으며, 완벽한 질서에 모두가 또 한번 놀랐다. 이 엄청난 사건은 어떻게 가능했고 또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인가.

어떤 이는 ‘붉은 악마 현상’에서 진보의 메시지와 해방의 기운을 읽는가 하면, 또 다른 어떤 이들은 파시즘의 흔적을 읽어내기도 한다. 레드컴플렉스 청산의 계기로 해석하는 이가 있는가 하면, 말도 안 되는 비약이라고 묵살하는 이도 있다. 자발적 참여의 새로운 문화 현상이라는 분석이 있는가 하면, 국가와 자본과 언론의 교묘한 합작품이라고 경계하는 이도 있다. 개인주의에 빠져 있던 젊은 세대가 공동체정신과 애국심을 몸으로 체험할 수 있었던 훌륭한 기회였다는 해석이 있는가 하면, 고민 없이 자란 세대의 철부지 광기라는 해석을 내놓는 사람도 있다. 히딩크를 빌어서 우리 사회의 고질인 연고주의를 청산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천진난만한 발상이라고 비웃는 이들도 없지 않다. 파업노동자의 절규와 미군 장갑차에 희생당한 여중생의 아픔을 묻어 버렸다는 비난이 들리는가 하면, 그런 편협하고 낡은 발상으로는 진보도 없다는 단호한 반비판도 있다.

꽤나 벌어져 있는 두 입장이다. 그러나 두 입장 모두 ‘붉은 악마 현상’이 애초에 일정한 방향으로 기획됐거나 혹은 특정 성격으로 이미 틀 지워져 있는 것으로 전제한다는 점에서는 같다. 설령 국가나 자본이나 언론이 작용하고 의도한 부분이 없지 않더라도, 그것으로 저 열기 모두를 설명할 수는 없다. 설령 붉은 악마의 집행부가 자신들의 공식 입장인 ‘축구에 대한 사랑과 한국 축구 발전에 대한 기원’ 이상의 어떤 의도와 계획을 가지고 접근했다손 치더라도, 그것으로 저 엄청난 현상을 설명할 수 없음도 물론이다. 경기 결과를 FIFA나 개최국의 음모로 치부해 버리는 해석만큼이나 무모한 접근인 것이다.

‘붉은 악마 현상’은 실은 한 달 동안 ‘만들어진’ 작품이라고 봐야할 것이다. 그것도 크고 작은 수많은 주체들이 작용하고 참여하여 만들어낸 작품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의 역사적 배경과 한국민의 사회심리적 조건들도 크게 한 몫 했다. 불법과 편법이 판치는 사회질서로부터 겪어온 좌절감, 약탈적 세계질서로부터 강요받아온 민족적 서러움도 이번의 열기를 만들어낸 중요한 조건이었을 것이다. FIFA든 한국 정부든, 한국 기업이든 혹은 한국 언론이든 아니면 붉은 악마 집행부든, 어느 누구도 7백만의 열광적인 거리 응원과 완벽한 질서를 기획하지도 않았고 나아가 예상하지도 못했다. 그런 만큼 어느 누구도 7백만의 거리응원과 국민적 열기에 대해, 지적 재산권을 주장하거나 아니면 역사적 책임을 뒤집어쓸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엄청난 ‘사회적 사건’으로서의 ‘붉은 악마 현상’을 대하는 바른 자세는 무엇일까. 그것은 저 현상 안에 담긴 ‘다양한 의미와 요소들’을 ‘냉정하게 분석’하면서, ‘이후를 준비’하는 자세일 것이다. 이미 정형화된 현상이거나 혹은 누군가의 기획이나 각본에 따라 진행되는 사건은 더더욱 아니었기에, 그것의 작용과 의미 그리고 결과와 미래까지도 우리 사회의 모든 이들과 세력에게 열려 있기 때문이다. ‘붉은 악마 현상’은 분명, 항상 이윤을 쫓아 두리번거리는 세력, 우민정치의 유혹을 느끼는 집단, 국가절대주의를 재강화할 수 있는 기회를 노리는 세력 등에게 활짝 열려 있는만큼, 연고주의의 혁파를 간절히 염원해온 세력, 분열과 적대를 넘어 국민통합과 남북통일의 계기를 기다려온 집단, 그리고 대중의 자발적 참여를 통한 권위주의 타파의 가능성을 읽어내는 세력 등에게도 똑같이 열려 있는 것이다. 그것은 외국에서도 마찬가지다. 7백만 한국인의 질서 있는 거리응원은, 자국민의 일치단결을 강요하고 싶어하는 독재권력에게도 호재이겠지만, 권위주의 타파를 요구하는 민중세력에게도 훌륭한 교재인 것이다.

말하자면 ‘붉은 악마 현상’은 엊그제로 끝이 났지만, 그에 대한 문화투쟁은 막 시작된 셈이다. 중요한 것은 지적 근면이요 실천적 개입이다. 그 자체가 저절로 진보일 수도 한심한 광기일 수만도 없는 ‘붉은 악마 현상’을, 그리고 모든 가능성을 향해 열려 있는 저 엄청난 국민적 에너지를 사회 진보의 계기로 승화시켜 가려는 자세와 지혜가 필요한 것이다. 당연히 지금부터가 중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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