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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총서'는 만드는데 '전집'은 없다?
'헤겔총서'는 만드는데 '전집'은 없다?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2.03.06 12: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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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출판_ 화제와 유감 사이

헤겔 총서를 기획하고 있다는 반가운 소문. 그러나 초석이 되는 전집은 아직 없다.  
도서출판 b에서 '헤겔 총서1'로 기획, 번역해서 내놓은 게 『헤겔-그의 철학적 주제들』(프레더릭 바이저 지음, 이신철 옮김)이다. 2011년 한 해 '헤겔'을 열쇠말로 한 책들은 대략 13종이 간행됐다. 『정신현상학』같은 헤겔 원전의 번역이나 축약 번역서들, 그리고 특정 주제와 헤겔을 연결하는 저작들이 주를 이뤘다. 이렇게 본다면 바이저의 책은 다시금 헤겔을 전체적으로 조망해볼 수 있는 지적 기회를 제공한 것으로 읽을 수 있다.

독일 루트릿지 출판사의 ‘루트릿지 철학자들’이라는 새로운 시리즈의 문을 열고 있는 이 책 『헤겔』은 헤겔 철학의 간단한 역사적 배경과 핵심 논증들 그리고 헤겔의 철학적 유산 및 헤겔 철학에 관한 좀 더 읽을거리와 헤겔 용어 해설을 담고 있다. 번역은 2005년 영문판을 저본으로 했다. 저자는 영어권의 저명한 독일 관념론 연구자로 알려져 있다. 찰스 테일러(Charles Taylor)와 이사야 벌린(Isaiah Berlin)의 지도하에 옥스퍼드대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콜로라도대와 하버드대, 예일대 등에서 가르쳤고, 인디애나대를 거쳐 현재 시러큐스대 철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주요 저서로는 『이성의 운명: 칸트에서 피히테까지 독일 철학』(1987), 『계몽, 혁명 그리고 낭만주의: 1790~1800 근대 독일의 정치 사유의 탄생』(1992), 『독일관념론: 주관주의에 대한 투쟁, 1781~1801』(2002), 『철학자로서의 실러: 재고찰』(2005), 『헤겔』(2005), 『디오티마의 아이들: 라이프니츠부터 레싱까지 독일의 미학적 합리주의』(2009)가 있다.

저자는 일반적 입문들과는 달리 텍스트 소개나 전기적인 서술이 아니라 주제적 방식으로 헤겔 철학의 주요 측면들을 다룬다. 먼저 헤겔을 왜 읽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의 헤겔 철학에 대한 접근 방법과 관련된 문제들을 검토하고 헤겔의 생애와 시대를 개관한 후, '헤겔의 철학적 맥락과 초기 이상들', 헤겔 형이상학의 초석, 변증법적 인식론적 방법과 상호주관성, 사회철학과 정치철학, 역사철학과 미학, 철학사에서의 헤겔의 유산 등을 하나씩 짚어 나간다. 이런 구성의 매력이 번역자로 하여금 '적극적인' 번역에 나서게 한 것 같다.

옮긴이 이신철 박사는 "우리의 전반적인 헤겔 이해와 연구의 상황은 그리 만족스럽지 못하다"라고 말한다. 헤겔 이해와 연구 상황이 만족스럽지 못하기 때문에 헤겔을 가르치는 데도 문제가 있을 수밖에 없다. 사정이 이렇게 된 것을 두고 옮긴이는 "학부 커리큘럼에서―다른 철학자들과 비교해―헤겔 저작에 대한 부분적인 소개마저도 그 시간이 턱없이 부족"하며, "대학원 세미나나 다른 학술 강좌들에서도 헤겔 철학의 취급방식은 『정신현상학』이나 『논리의 학』, 『법철학』 등의 일정 부분들에 대한 강독에 그치고 있"음을 이유로 지적하고 있다. 그는 더 나아가 최근 "포스트모더니즘과 함께 일반화된 확신 즉, 세계란 이성적 전체와는 전혀 다른 것이라는 확신이 헤겔의 체계를 인간적 오만함의 망상적 산물로 치부함으로써 헤겔 독해의 이유가 붕괴된" 점도 놓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옮긴이는 이 '막다른 골목에 놓인 듯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반문한다. 그는 "우리에게 헤겔 철학의 미로에서 길을 찾을 수 있게 해주는 아리아드네의 이끄는 실들"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바이저의 이 책이 그런 아리아드네의 실 가운데 하나라는 생각을 엿볼 수 있다.

옮긴이의 지적에 대체로 동의하지만, 과연 이런 접근만이 '막다른 골목에 놓인 듯한 상황'을 극복하는 길일까 하는 의문을 떨칠 수 없다. 가장 기본적인 우리말 텍스트가 확보되지 못한 상태라면, 어쩌면 역자의 고민은 되풀이 될 수밖에 없는 게 아닐까. '헤겔 전집'이 없다는 것, 누구나 늘 '원전'으로 헤겔을 만나야 한다는 것은 영원히 헤겔을 전문적인 권위의 성안에 가둬두는 일일지 모른다. '총서'를 기획하는 마당이라면, 작은 인문전문 출판사들끼리 '전집'을 연대해서 간행하는 것도 방법 아닐까. 지금은 이렇게 '헤겔'이 독해붕괴 상태에 처해있겠지만, 조만간 철학의 거장들이 하나둘 같은 운명에 처해질지 모른다. 한 출판사가 많이 축약된 내용으로 '대중'에게 헤겔을 건네고 있지만, 이것은 편법에 지나지 않는다.

1990년대 중반 헤겔 전공자로부터 "전집이 없다. 관련 학자들이 모여 전집 간행을 해보면 어떨까"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도 십수년이 지났지만, 한국 철학계는 여전히 '헤겔 전집'이 없다. 학계도 나몰라라 한다. 출판사는 수지타산 내세워 방관하고 있다. 그러고보니 우리 학계는 '전집'에 참 무심하다. '헤겔 총서'가 반가우면서도 씁쓸한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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