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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여성부의 호주제 폐지 발표에 즈음해서
[특별기고] 여성부의 호주제 폐지 발표에 즈음해서
  • 교수신문
  • 승인 2002.07.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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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06 13:29:19
김진호/목사·당대비평 편집위원

전 세계를 누비면서 축구의 열기를 수없이 접해왔던 베테랑 기자들이 한국의 대규모 거리 응원을 보고는 이구동성으로 “이런 것은 생전 처음 보았다”고 한다. 거리 응원단만이 아니라 전 국민이 단 하나의 색, 단 하나의 구호 아래 일사불란하게 모였다. 도대체 유래를 찾기 쉽지 않은 이러한 총동원이 우리에게 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국민등록제도에서 그 주된 이유 하나를 본다.

우리의 국민등록제도는 대단히 강력한 전체주의적 양상을 띤다. 요컨대 한국은 근대국가의 대표적인 국민관리 장치인 호적·주민등록·주민번호·주민증 등을 모두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이례적으로 그것들이 매우 통합적으로 관리되고 있다는 얘기다. 나의 관심은 이러한 행정적 일원주의가 우리의 일상 속에 스며듦으로써 우리의 일사불란한 국민적 공동체 의식이 강고한 자의식으로 자리잡게 됐다는 데 있다. 가까이는 금 모으기에서 월드컵까지 언제든지 부름만 받으면 당장 질서정연하게 줄맞춰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는 ‘대~한민국 국민’이라는 자의식인 게다. 한데 또 하나 간과해서는 안 되는 사실은, 우리의 국민등록제도는 ‘대~한민국 국민’을 좀더 구체적으로 그려내는 하위적 이데올로기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다.

근자에 논란을 일으키는 ‘호주제’는 바로 그러한 하위 이데올로기에 대한 문제제기인 것이다. 신분적 정체성에 관한 기록인 호적은 ‘나’를 ‘가족’의 일원으로 기록한다. 이때 가족은 함께 생활하는 실재하는 가족이 아니라, 호주를 중심으로 하는 혈통적 대가족이다.

그것이 여·남의 위계적 이분법에 기초하고 있다는 점은 더 얘기할 것도 없다. 물론 이러한 호적상의 신분이 ‘나’의 법률적 활동에 거의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런 점에서 이것은 불필요한 규정일 수 있다. 하지만 남아선호사상에서 단적으로 볼 수 있듯이 여·남의 위계적 이분법에 기초한 질서관은 일상 생활에서 여전히 강력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가족법 같은 관련법의 대원칙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또한 그것은 혈통주의적 국민의식에도 영향을 미침으로써, 외국인과의 혼인 등에 부정적으로 개입하는 관념을 낳았다. 그것은 특히 한국에 체류하는 외국 출신 남성이주노동자가 한국 여자와 결혼할 경우 심각한 문제로 다가온다. 그밖에 -동거등의 대안적 가족 형태를 법률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서적으로도 수용할 수 없게 하는 제도적 장치라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다.

어제, 호주제 등 성적 불평등을 내포하는 가족법상의 요소들을 2007년까지 정비할 예정이라는 여성부의 발표가 있었다고 한다. 이혼율이 크게 높아지고, 동거 등 제도 외부의 결혼이 급속도로 늘어가고, 성별 출산의 임의적인 조절이 한결 용이해지고, 외국계 거류민이 급증함에 따라, 남성 중심적 혈통주의에 기반한 호주제는 이미 적지 않은 부작용을 끼치고 있는 게 사실이다.

유림 세력을 포함한 완고한 보수주의자들, 그리고 ‘마초성’을 배설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 ‘유아적 남아들’의 적지 않은 방해 활동이 예상된다. 그럼에도 법 논리에 있어서나, 현실 여건에 있어서나 호주제의 폐지는 시대의 대세임에 분명하다. 그 반인권적인 시대착오가 지양돼야 한다는 것은 더 이상의 논란거리가 아니다, 아니 아니어야 한다.

한데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되는 또 하나의 사실은, 호적제의 호주제적 문제점을 지양하는 일이 국가 차원의 주민 통제를 보다 강화하는 방향, 예컨대 주민등록제의 강화로 나아가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성적 평등’이라는 대의가, 전혀 의도한 것이 아님에도, 국가에 의한 시민사회 통제 강화의 기재로 변질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여성부의 넘치는 의욕이 정부 차원에서 적극적으로 수용된다 하더라도, 시민운동의 관여는 더욱 성찰적인 숙고를 바탕으로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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