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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단] 조규형 고려대 교수, ‘사이버공동체와 탈식민’통해 인식론적 분석 시도
[진단] 조규형 고려대 교수, ‘사이버공동체와 탈식민’통해 인식론적 분석 시도
  • 전미영 기자
  • 승인 2002.07.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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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06 13:26:46
지난달 29일 한국영미문화학회에서 조규형 고려대 교수(영문학)는 ‘사이버 공동체와 탈식민 : 가상화 시대의 인식론적 지도’라는 논문을 발표했다. 그는 이 논문에서 20세기에 태어나 21세기까지 살아남은 ‘탈식민’을 포스트모던 시대의 인식론과 사이버스페이스로 설명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조규형 교수는 ‘탈식민’과 ‘사이버 공동체’라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개념을 엮으려는 이유로 오늘의 탈식민이 몇몇 학자들이 이론으로만 걸터듬는 옛것이거나 문서 안에 죽어자빠진 개념이 아니라 살아 뛰는 현실로 불러와야 한다는 것을 든다.

그가 찾은 탈식민의 현실 한가운데는 ‘네트워크’가 삐죽이 자리잡고 있다. 그는 “인터넷과 같은 네트워크가 우리의 탈식민 논의에 어떤 현실 점검을 요구하고 있는 지” 살펴보려 한다. 새로운 시도이면서 자칫 위험한 시도이기도 하다.

체 게바라와 자본의 얼굴

그 필요성은 “오늘의 탈식민 논의의 방향은 현실과 자신의 논리적 상황을 점검하고 그 관계를 재정립해 나가야 한다”는 데서 출발한다.

오늘의 탈식민론이 특히 유의해야 할 점은 바로 “담론의 논리 못지 않게 현실이 엄청난 규모와 속도로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조 교수가 보기에 적어도 속도싸움에서 탈식민론은 현실의 상대가 되지 못한다. 탈식민론의 이론적 배경이 많은 부분 20세기 초반에서 멀리 떠나오지 못했기 때문이다.

체 게바라와 프란츠 파농, 말콤 엑스는 이제 ‘원산지’에서조차 관광상품이다. 종이컵과 티셔츠에 새겨진 게바라와 말콤 엑스는 우리가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하는 과정에서 잠깐 동안이나마 그 소비에 ‘반항’하게 해주는 ‘이미지’로 작용한다. 조규형 교수는 이들이 소비 사회의 일부분으로 흡수된다는 사실에 대한 엄연한 증거라고 주장한다.

물론, 게바라와 말콤 엑스의 티셔츠를 입으며 소비를 뛰어넘어 그 무엇을 감지하는 예민한 촉각을 가진 이들도 있지만 말이다.

서구의 많은 이론들이 소비사회의 한 특성으로 거론된 수 있다는 시각은 독특하다. 20세기 후반 들어 문학과 문화이론 분야에서 한 시기를 구가한 이론들의 주기가 계속 짧아져 왔다는 데서 소비와 닮은꼴을 찾고 있는데, 경쾌한 음악과 함께 쇼핑카트에서 계산대로 잽싸게 올려진 이론들의 묶음에는 구조주의, 탈구조주의, 신역사주의가 끼어있다. 탈식민주의 역시 짧은 순간 진열대에 놓여 있다가 ‘소비되거나’ 혹은 ‘창고에 쌓이거나’의 운명이라고 보는 한편, 탈식민주의의 등장이 현실에 대한 인식 변화를 위한 커다란 발걸음이었음도 인정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그렇다면, 디지털과 네트워크는 어떻게 탈식민과 만나는가.
조규형 교수가 보기에 디지털 매체는 ‘이제껏 발명된 어떤 것보다 발달된 의사교환 매체’이다. 개인과 개인, 개인과 집단들이 효과적으로 의사를 교환할 수 있도록 하는 중간 구실을 톡톡히 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비록 가상공간에서의 가짜 감각이지만 ‘오감’을 총동원해 나누는 의사소통은 분명 새로운 경험이다.

그러나 조교수는 디지털 매체가 갖고 있는 ‘이중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고 경고한다. 디지털은 시·공간의 구속을 벗어난 자율적인 의사소통의 매체이지만, 그것 또한 강력한 자본의 힘이라는 사실 때문이다. “그것은 예전의 어느 매체보다도 대규모 자본과 기술에 의해 창출되고 유지되면서도 매체의 중립적이고도 깨끗한 이미지 제고를 위해 그러한 내재적 조건의 규모가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는 말 속에서 우리는 깔끔한 웹 디자인 속에 숨은 자본의 얼굴을 떠올릴 수 있다.

자유로운 의견 교환이 최대한의 상호이익을 창출하는 디지털망은 “대규모 자본과 고도의 기술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매체’이다.

가상화의 방향은 ‘포스트모던 사회의 방향’으로 설명돼 온 시간과 공간의 압축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으며, 이러한 시·공간의 압축은 자본이 새로운 국경을, 새로운 변방을 개척하는 차원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논의를 확장시키면 디지털 매체로 가속화되고 있는 세계화는 자본을 기반으로 한 ‘세계의 가상화’이다.
이쯤에서 탈식민과 네트워크가 만나는 지점의 윤곽이 차츰 잡혀온다. 개척시대의 미국이 인디언들의 약탈과 살육으로 아메리카를 건설했고, 알래스카까지 차지하고 난 뒤 밖으로 눈을 돌려 유엔 평화봉사단, 달 탐사까지 점차 시대 변화에 따라 그 정치 지형을 넓혀갔다면, 이제 미국의 미개척지는 사이버스페이스이다.

사이버스페이스, 또 하나의 사유지

디지털 매체에서 뛰어노는 이들은 자율과 능동성이 네트워크의 생명이라고 믿고, 그들이 ‘공유지’에서 뛰어노는 것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고 믿지만, 미국에게 사이버스페이스는 또 하나의 ‘사유지’일 뿐이다. 마이크로소프트가 리눅스와 냅스터가 설치는 꼴을 두고볼 수 없는 것은 그래서 당연하다.

즉 조규형 교수에게 ‘가상(virtual)’이란 가상세계까지 식민화하는 ‘전방위적인’ 식민화의 뜻을 갖는다. 이쯤 되면 현실의 문제는 네트워크를 타고 가상공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현실로 내려온다. 네트워크를 자유로운 소통과 정서적인 공동체로 인식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그것은 달콤한 착각이다.

네트워크가 탈식민 아닌 식민주의를 더욱 견고하게 한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지만 인터넷이 국민국가 특히 폭압적 국가에 대항하는 매체로서의 기대도 저버리지 않고 있다는 것은 이중적일 수밖에 없다.

멕시코 사파티스타의 반세계화 운동을 예로 들면서 인식론적 지도까지 그려내려는 시도는 조금 버겁게 느껴진다.

전미영 기자 neruda73@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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