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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쟁점서평] 『자본주의의 기원: 장기고찰』(엘린 메이식스 우드 저·정이근 역, 경성대출판부 刊)
[쟁점서평] 『자본주의의 기원: 장기고찰』(엘린 메이식스 우드 저·정이근 역, 경성대출판부 刊)
  • 박섭 인제대
  • 승인 2002.07.06 0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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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07-06 13:07:29
박섭 / 인제대·경제학

유럽에 의한 자본주의 형성이라는 사고를 가장 적극적으로 비판한 것은 브레너였을 것이다. 그는 1976년에 쓴 논문에서 자본주의가 상업에서 탄생했다는 주장을 비판하고, 영국 농촌에서의 특별한 토지 소유관계가 자본주의를 낳았다고 주장했다. 이 주장은 자본주의가 유럽의 산물이 아니라, 영국의 산물이라는 것으로 연결된다.

 
우드의 이 저서는 브레너의 비판에 동조하며 그 위에서 유럽 중심주의에 대한 비판, 자본주의의 영속성에 대한 비판, 농업 자본주의라는 관점을 취함으로 해서 새롭게 할 수 있는 몇 역사해석을 전개하고 있다.

우드는 자본주의의 기원을 설명하고 있는 거의 대부분의 역사학자들이 세계는 처음부터 자본주의를 자신의 속에 품고 있었으며, 자본주의의 성장을 막는 장애가 제거되면서 자본주의가 점차 드러났고 부르주아 혁명 이후 그것이 만개한 것으로 생각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우드는 위의 사고 속에서 유럽 중심주의, 즉 자본주의 발달의 장애물을 제거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유럽뿐이었다는 사고를 찾아내고 있다.

우드는 브레너와 마찬가지로 자본주의는 유럽의 특수함 속에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영국의 특수함 속에서 탄생했음을 보이고 있다. 우드에 의하면 사회제도가 그 사회의 생산자들을 시장경쟁에서의 승리를 위해 행동하도록 강제할 때 비로소 자본주의가 탄생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사회는 오직 영국에서만 탄생할 수 있었다.

영국 이외의 지역에서는 19세기 초까지도 지배계층의 수입이 경제외적 강제에 의해 얻어졌다. 그렇지만 영국은 그렇지 않았다. 이미 16세기에 영국의 지주·자치도시·회사가 가지고 있었던 경제외적 강제는 소멸했다. 그리하여 지주가 자신의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는 생산물의 교환가치를 늘려야 했다. 한편 지주가 경제외적 강제는 잃었지만 대토지 소유는 인정 받았다. 그리하여 차지농은 경작권을 가지지 못했고 경지를 임차하기 위해서는 생산물의 교환가치를 높여야 했다. 그렇게 해야 많은 지대를 납부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영국에서 시장경쟁이 최고의 명령으로 되었다. 이것이 지속적인 ‘개량’을 낳았고 산업혁명도 낳았다. 이상이 이태리에서도 네덜란드에서도 프랑스에서도 자본주의가 탄생하지 못하고 오직 영국에서 탄생했던 이유였다.

자본주의가 영국의 농업에서 탄생했다고 생각하게 되면 제국주의 정책이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설명은 부적절하게 된다. 영국 사회는 영국이 식민지를 가지기 이전에 이미 자본주의적이었기 때문이다. 그에 따르면 영국의 식민 정책은 다른 나라들과 달랐는데 그것은 영국이 이미 자본주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정부는 17세기 중반 캐나다에 뉴프랑스를 건설하기 시작했고, 그곳에 영주제를 이식하려 했다. 그렇지만 영국은 이미 16세기 말에 아일랜드에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이식했다.

우드의 관점에서 자본주의의 탄생을 살피면 민족국가가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사고도 부적절하게 된다. 오히려 영국의 민족국가가 자본주의의 소산이다. 영국에는 17세기에 이미 런던을 중심으로 통합되고 경쟁적인 국내시장이 있었다. 이 힘이 민족국가를 강하게 했다. 프랑스에서는 민족국가가 절대주의를 낳았던 것도 민족국가가 자본주의를 낳았다는 사고의 부적절함의 한 이유이다.

한국의 전근대 사회는 자본주의를 만들어낼 수 없었다고 말하면 한국에서는 대단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조선사회 정체론을 주장하듯이 오해 받기 때문이다. 서평자는 브레너와 우드의 사고에 동조하는데 자본주의란 17-18세기 영국 사회의 특수성에서 만들어졌고, 자본주의가 만들어진 이후 영국 이외의 모든 국가는 어쩔 수 없이 자본주의에 적응했어야 했다고 생각한다.

유럽대륙의 국가들도 그것에서 예외가 아니었다. 1786년에 영국과 프랑스는 ‘수입 금지와 금지적 관세를 가능한 한 배제’하는 조약을 맺었다. 그러자 영국의 값싼 공장 생산물 수입이 급증했고, 프랑스의 상점은 영국 상품으로 가득찼다. 도시의 실업자가 급증한 데에 겹쳐 1787년과 1788년에 흉년이 들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혁명 이후 집권한 나폴레옹은 영국으로부터의 수입을 금지했고 프랑스의 공업을 육성했다. 즉 영국에서 가해진 외압이 프랑스의 자본주의적 변화를 일으켰던 것이다. 19세기에 한국이 자본주의를 만들어 가고 있었다고 생각할 근거는 없고, 만들고 있지 않았다고 해서 내재적 발전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여러 사회들은 자신의 길을 걷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우드의 주장에 대개 동의하지만 자본주의와 제국주의의 관계에 대한 설명은 정확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우드는 자신이 비판하고 있는 논자들이 제국주의가 자본주의를 낳았다고 주장한다고 압축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그들은 제국주의가 자본주의의 성장을 촉진시켰다고 주장하고 있다. 우드가 촉진했다는 주장도 비판할 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이 책에는 그런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우드는 자본주의가 역사의 종말이라는 주장, 새로운 변화는 유럽에서 일어난다는 주장, 시장을 규제해 그것이 인간 모두에게 봉사하게 할 수 있다는 주장을 비판했다. 그에 의하면 자본주의는 영국에서 특수한 소유관계가 만들어지면서 탄생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는 인간의 본성에 내재해 있는 영원한 것이 아니다. 따라서 새로운 변화는 유럽 이외의 어디에서도 일어날 수 있게 된다. 우드는 시장을 규제해 그것이 인간에게 봉사하게 하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에 시장을 규제한다는 것은 대안이 되지 못하며, 대안은 사회주의밖에 없다고 비판한다. 세 번째의 비판은 추상적이어서 불만스럽지만 우드의 다른 글들을 읽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번역서의 원본은 금년 7월에 출판될 예정이다. 원본보다 3개월이나 먼저 출판된 것은 이 책의 특기할 만한 점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만큼 때로 번역에 이상한 곳이 있어도 원본을 들추어볼 수는 없었다. 단 구제역 대신에 아구창이란 단어를 쓰고 있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오역인 듯하다. 마지막 좋은 읽을거리를 제공한 역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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