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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융합연구와 순혈주의
학문후속세대의 시선_ 융합연구와 순혈주의
  • 손은하 부산대 HK연구교수·영상정보공학
  • 승인 2012.02.27 1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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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은하 부산대 HK연구교수·영상정보공학
한국 학계의 배타적인 성향과 순혈주의는 융합연구를 힘들게 한다. 아니 연구 자체의 힘듦보다는 연구자가 발붙일 곳이 없음에 더욱 깊은 시름을 안겨준다. ‘연구한 논문을 어디에 실어야 할까’는 고민을 필두로, 연구가 전공과는 갈수록 점점 멀어져 가고 있는데 과연 어떤 곳에 정착을 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으로 인해 때론 보이지 않는 뿌연 안개 속에 갇힌 기분이 들곤 한다.

필자는 영상공학을 전공했고, 그 가운데서도 영상컬러(Image Color)에 관한 연구를 했다. 지금은 ‘로컬리티(Locality)’를 어젠다로 연구하는 곳에서, 대부분의 연구층이 ‘인문학’인 틈바구니 속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다.

‘공학’이라는 분야는 인문학과는 상당히 거리가 먼 학문 중 하나다. 실제로 데이터를 분석하고 프로그램을 돌려 실험을 하는 연구방식에 익숙한 필자가 자기의 논지를 글로만 풀어나가는 학문의 글쓰기 형태에 적응하기까지는 위산과 코티졸(육체적, 정신적, 감정적 스트레스가 지속적으로 가해질 때 나오는 호르몬)이 벌컥벌컥 나오는 게 온몸으로 느껴질 만큼의 스트레스를 경험한 이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공학 논문은 말에 살붙이기를 꺼려한다. 실험한 데이터를 잘 가공하고 분석해 객관적이고 간단명료하게 글을 써내려가는 방식을 선호한다. 실상은 논문 전체가 실험 과정과 결과물로 거의 채워지기 때문에 길게 할 말도 없다. 이런 방식에 익숙한 나에게 인문학 관련 연구소의 입소는 항공기가 방향을 바꿀 때처럼 곡선 주행을 할 수 있는 고민의 시간을 주지 않았다. 앞뒤가 없는 전차가 가던 방향을 바꾸듯 운전자가 반대 좌석으로 빠른 시간 내에 옮겨 타야 하는 급선회를 요구했다.

글 쓰는 방식을 차치해 두고라도, 두 학문은 연구경향에서도 많은 차이를 보인다. 관심 주제 자체가 다르다는 것이다. 단 한 번도 고민해보지 않았던 주제들을 이곳 연구소에 들어오면서 대면하게 됐다. 인문학 관련 서적을 보기는커녕 인문학을 연구하는 친구도 없던 내게는 사적인 담화 소재로 조차 나눠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접하고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러다 점차 지역과 장소, 공동체, 도시문화 등에 관한 주제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름조차 생소했던 ‘로컬과 로컬리티’라는 어젠다를 두고 도대체 무엇에 관해 논의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 지 어언 5년차. 이제는 지금껏 나의 머릿속 관심 대상에서 한참 비껴 있었던 소수성, 주변성, 다원성 등의 논의로까지 고민을 확장하게 됐다. 다행히도 두 학문의 접점을 찾아, 도시 이미지를 환경 색채와 접목해 컬러에 대한 전문지식을 바탕으로 인문학적 시선으로 바라보는 융합연구로의 연결도 진행 중에 있다.

‘인문학이 인간(문화)에 관한 학문, 인간을 위한 학문이라면 어쩌면 모든 학문은 같은 곳을 지향하고 있지 않나? 그렇다면 지향점이 같은 학문들이 소통되지 않을 건 또 뭐가 있나!’ 하는 생각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앞서 말한 학문의 경향성, 글쓰기 논의 등의 견해는 어쩌면 나 스스로가 그런 굴레를 만들어 놓고, 그 틀을 더 좁게, 더 높게, 더 견고하게 만들며 힘겨워 한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에 도달했다.

오히려 다양한 학문에서 연구하다 보니 만나는 접점이 어디인지 더 쉽게 보이고, 필요한 부분이 무엇인지 더 빨리 파악하는 장점이 생겨났다. 또한 기존에 보지 못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신선한 고찰이 된다는 점에서 융합연구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함을 발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발을 담그고 있는 학문의 장은 인문학 중심이다. 따라서 그 외의 학문은 또 다시 비주류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비주류, 소수층이 기지개를 켜고 크게 도약하기 위해서는 연구자 나름의 자구책 강구뿐만 아니라 구조적인 토대 마련도 뒷받침돼야 함은 자명한 일이다.

조금만 뒤집어 생각해 보면 박쥐는 조류와도, 포유류와도 모두 어울릴 수 있는 존재가 아닌가! 조만간 이러한 학문이 세상을 바꾸는 날이 올 것이라는 희망으로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이러한 자들에게 ‘환대’까지는 아니더라도 문호를 활짝 열어 주시길. 또한 지속적인 연구를 할 수 있는 환경이 마련되는 그날까지 지치지 않도록 독려해 주시길.


손은하 부산대ㆍ영상정보공학
부산대에서 박사를 했다. 「부산 원도심의 역사와 문화 색채 이미지」 등의 논문이 있으며 커뮤니티 아트(Community Art), 도시 문화의 환경색채 이미지에 관한 연구에 관심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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