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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망감’조차 무감각한…
‘절망감’조차 무감각한…
  • 이희진 한국항공대·역사학
  • 승인 2012.02.20 1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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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후속세대의 시선

이희진 한국항공대·역사학
대놓고 말하려고 하지는 않지만, 지금 ‘학문후속세대’라고 불리는 집단에 흐르는 심정을 적나라하게 표현하자면 한마디로 ‘절망감’이라고 할 수 있다. 잊을 만하면 터지는 시간강사의 자살 사건 같은 것이 그러한 표현의 하나다. 학문에 정진한다는 자부심으로 연구에 몰두했으면서도, 아무 기반도 잡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절망감’이라는 말조차 무감각한 단어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이렇게 시작하면 ‘취직 못한 정도를 갖고 과격하게 몰아간다’며 펄펄 뛸 인사들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절망감의 밑바닥에는 우리 사회에 겉으로만 드러난 것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가 있다. ‘학문후속세대’가 이렇게 공황상태에 가까운 절망감을 느껴야 할 이유가 단순히 ‘취직이 되지 않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사실 생존 기반을 마련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에 있어서는 ‘학문후속세대’만의 문제일 수는 없다. 지금 대한민국 사회는 곳곳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런 마당에 ‘우리 어렵다는 식’의 말은 투정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이왕 어려울 것 각오하고 시작한 ‘학문후속세대’ 대부분의 절망감을 겨우 이런 차원으로 치부할 수는 없다.

온갖 고난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분야에서 묵묵히 노력하던 사람들이 심한 좌절감을 느낄 때는 대체로 정직하지 못한 편법으로 부와 명예를 차지하는 꼴을 볼 경우다. 필자만 하더라도 같은 내용 이리저리 편집하거나, 심지어 남의 논리 도용하고 왜곡까지 시켜 연구성과 불려내는 꼴을 흔히 본다. 국민의 혈세로 지원되는 연구비를 받았다는 성과물들까지 그런 경우 많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중에 제재 받는 경우를 본 적이 없다. 오히려 그런 성과물을 바탕으로 더욱 영향력 있는 자리에 오르며 승승장구하는 게 보통이다. 이건 일부 연구자의 문제로 치부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적극적인 비호가 없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 아니니까.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비리를 보고도 침묵을 강요받는 상황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그러면 뼈를 깎는 노력해가며 연구성과 낼 의욕이 생길까. 최근 연구업적 부족으로 교수 임용심사에서 탈락한 사람에게 해주었던 충고(?)는 가관이다. 남들은 날림으로 업적 채워내는데, 그거 하나 못해 갖고 밀어주는 자리도 차지하지 못했다고.

내놓고 하지는 않지만, 묵묵히 연구에 몰두하는 사람은 돌아서서 바보라고 손가락질하는 풍조까지 생기는 것 같다. 사실 현실적으로 보면 바보짓이 분명하다. 관심 갖고 보는 사람도 별로 없는 학술지에 한번 올려보는 것 이외에 아무 의미도 찾을 수 없는데도, 연구성과 내보겠다고 몸 망쳐가며 힘쓰는 게 바보짓이라면 바보짓이니까.

물론 날림으로 연구성과 내서 출세하는 것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이 또한 선택받은 집단에 속해 있는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래서 그런 집단들이 명분 찾아가며, 더 쉽게 업적 조작을 할 수 있도록 ‘학술지 등급제’ 같은 제도를 만들어 내고 있다. 더 이상 견디기 어렵게 비판이 쏟아지면 눈가림으로 경쟁자의 진입만 막아놓고 ‘개선책’이라고 내놓는다. 앞으로 어떤 방향으로 가려고 이러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적극적으로 개선을 촉구해봤자, 돌아오는 건 ‘불평분자’라는 낙인뿐이다.

그런데 부실이 너무 심해지다 보니, 요즘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의욕을 잃고 매장돼 가는 일부 계층의 문제에 그칠 것 같지도 않다. 최근에는 대학 자체가 사회적인 문제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아무리 언급을 회피하며 숨기려 해도 대학의 근본적인 문제가 ‘고비용 저효율 구조’라는 점은 분명하다. 대학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연구 인력이 하는 짓을 보면서도,  ‘고비용 저효율 구조’가 되는 이유를 굳이 연구하고 분석해야 할까.

이런 사정 때문에 대학에도 구조조정의 칼바람이 불 것이고, 뜻있는 연구자들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질 수밖에 없다. 결국 의무는 날림으로 채우고, 누릴 건 다 누려놓은 기득권층이 남겨놓은 후유증을 다음 세대가 떠안아야 한다는 뜻이다. 이런 상황 고쳐놓을 생각도 않는 상태에서는, ‘그저 묵묵히 연구에 몰두하며 희망을 가지라’는 덕담조차 위선에 불과하다.

 

이희진 한국항공대ㆍ역사학
서강대에서 고대사 전공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백제의 멸망과정에 나타난 군사상황의 재검토」, 『전쟁의 발견』 등 한국사에 대한 날카로운 시선으로 다양한 논문과 저서를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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