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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의 先見之明 “세계화와 열린교육”
이화의 先見之明 “세계화와 열린교육”
  • 최성욱 기자
  • 승인 2012.02.20 15:0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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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여성교육을 이끈 전 총장들

메리 F. 스크랜튼(1886~1890)

1886년 뉴잉글랜드 지부로부터 최초의 선교사로 지명받아 한국에 와서 단 한 명의 학생과 함께 이화학당의 문을 열었다. 지식습득과 기독교의 정신을 알게 하는 데 교육목적을 뒀다.

“우리의 목표는 이 여아들이 외국사람들의 생활, 의복, 환경에 맞도록 변하게 하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단지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만드는 것으로 만족한다. 우리는 한국인이 한국적인 것에 대하여 긍지를 갖게 되기를 희망한다.”

룰루 E. 프라이 (1907~1921)

여성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해 1910년 대학과를 신설했다. 1914년 유치원, 1915년 유치원 사범과를 설치해 교수진 강화와 교과과정 정비, 제반규칙 제정 등 학교 행정의 현대적 기틀을 마련했고 ‘메이데이’ 행사를 처음 시작했다.

“수십년간 한국 여성들은 자신을 위한 ‘향상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 속에서 만족하고 살아 왔으나, 이제는 그들이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때까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국가의 운명이 여성에게 달려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시간과 자본을 투자해 여성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엘리스 R. 아펜젤러(1922~1939)

1925년 4월 이화학당 대학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발족시킨 초대교장이다. 신촌캠퍼스 이전을 위해 뉴욕에서 모금 운동을 벌이는 등 신촌캠퍼스 완공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39년 명예교장이 됐다.

김활란(1939~1961)

1931년 미국 콜럼비아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아 한국 최초의 여성박사가 됐다. 이화여대 초대 총장으로 취임한 이래, 역사의 격동기를 함께 했다. 대한민국상, 막사이사이상, 다락방상 등을 수상했다.

“지금 우리들은 과거 선배들이 가졌던 것과 똑같은 헌신적 정신을 가지고 있는가. 침식조차 잊고 학교와 나아가서는 국가를 위하여 싸웠던 것 같은 정성이 있는가. 집에서 안 보내주면 도망을 와서까지 배우려고 애쓰던 학도로서의 기풍을 지니고 있는가. 앞으로의 이화는 지금 우리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큰 규모와 체제로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계화’라는 목표와 전망이 서야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1961년 5월 ‘창립 75주년 기념식사’ 중에서)

김옥길(1961~1979)

제8대 김옥길 총장은 이화의 새로운 역할을 이화교육의 세계로의 확대와 여성의 인간화를 위한 공동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아시아지역 여자기독교대학협의회’ 구성과 학술세미나 개최 등의 활동을 주도했다.

한국 최초로 파키스탄에 선교사를 파견해 이화의 섬김과 나눔의 정신을 실천했다. 재임 기간 동안 ‘열린교육정신’을 바탕으로, 5천명 안팎이었던 학생 규모가 8천명으로 확대됐다. 학교 기반이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성장의 계기를 마련한 총장으로 평가 받는다.

‘실험대학’ 제도는 김옥길 총장의 대표 교육성과다. 이화여대에 새로운 학풍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제도적 정비를 모색하고 학생들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더불어 1970년대, 국내 대학 최초로 여성학 강좌를 개설해 한국사회에 여성문제 인식의 틀을 마련했다.

최성욱 기자 cheetah@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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