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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리더의 산실을 자부한다 … “이제는 돌려줘야 할 때”
여성 리더의 산실을 자부한다 … “이제는 돌려줘야 할 때”
  • 최성욱 기자
  • 승인 2012.02.20 14:4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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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여대 126년 ‘여성교육’ 변천사

 

이화여대가 배출한 여성 1호 동문들. 왼쪽부터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1886년 졸), 법조계 첫 여성 고시합격자(1952년)이자, 한국 최초의 여성 변호사(1954년) 이태영(1936년 가사과 졸), 한국 최초의 신문사 여사장 장명수(1964년 신문방송학과 졸), 최초의 여성 국무총리 한명숙(1967년 불문과 졸), 대기업 광고기획사 첫 여성이사 최인아(1984년 정치외교학과 졸). 사진제공 : 이화여대 홍보팀

 ‘여자가 무슨…’

1세기가 넘는 이화여대의 역사를 부여잡고 끙끙 앓다가 이 한마디에 ‘유레카’를 외쳤다고 하면 비약일까. 이화여대의 126년 역사를 추동한 건 어쩌면 이 한마디였는지 모른다. 1886년 5월, 김부인이라고 불렸던 한 젊은 여성이 왕비의 통역관이 되겠다는 꿈을 안고 이화학당 문턱을 서성였을 때도 머릿 속에 맴맴 돌았을 한마디. ‘여자가 무슨…’

이화학당 창립자 스크랜튼(M.F. Scranton) 堂長, 대학과를 만든 4대 堂長 프라이(Lulu E. Frey), 전문학교 6대 교장 아펜셀러(H.G. Appenzeller), 종합대학 설립자 7대 총장 김활란, 여성학을 수입한 8대 총장 김옥길, 연구중심대학의 기틀을 마련한 10대 총장 윤후정 등 이화여대를 이끌어온 주역들이 한결같이 마주해야 했던 편견의 벽이다. 시기마다 주력사업은 달라도 여성억압의 사회적 편견은 오롯이 대물림됐다.

이런 면에서 이화여대가 걸어온 길은 여성 억압과 편견에 대한 반작용이고, 저항의 역사로 해석될 수 있다. 이 역설은 그들이 옮기는 발걸음에 ‘최초’와 ‘1호’라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었던 배경이기도 하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박사·공인회계사·변호사·헌법재판관·국무총리… 모두 이화여대에서 배출했다. 한국 최초의 여의사 박에스더와 최초의 여성 물리학 박사 모혜정은 대표적이다. 

잘 알려지지 않은 또 하나의 사실은 이화여대가 해방 후 최초로 인가받은 종합대학이라는 것. 여자대학 중 처음이자 종합대학 통틀어 최초다. 이를 두고 이경숙 이화여대 부총장은 “(대학과를 만들었던) 1910년부터 품어왔던 여성 전문가, 여성 고등교육의 수료자들이 전후 한국사회에서 ‘전문가’로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해준 사건”이라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1910년 프라이 堂長이 “여자를 가르칠 수 있는 여자가 필요하다”며 대학과를 창설하려고 하자, 동료선교사들조차 “여자에게 대학교육은 불필요하고 시기상조다”라고 말렸다고 하니, 이화여대의 지난했던 길을 짐작할 만하다.

1996년 공과대학 설립, 종합대학 인프라 완성

여성교육의 필요성이 대두된 근대에도 여성이 학문을 한다는 것은 그저 ‘자식교육과 집안 살림을 잘 해내기 위함’일 뿐이었다. 이화여대는 그러나 정의숙 전 총장이 ‘이화100주년 기념식’에서 강조한 것처럼 “이화의 100년은 여성의 인격화를 위한 역사였고 인간의 가능성을 보여준 실증”이다. 물론 이화여대도 초창기에는 가정·사범·음악학과 정도의 제한적인 여성교육기관으로 출발했다. 이화여대는 그러나 의과대학, 자연과학대학에 이어 1996년 공과대학을 설립하면서 종합대학의 자양분을 마련했다.

특히 당시 공과대학 설립은 전 세계 여자대학에서 최초이자 유일했다고 알려져 있다. 정보통신기술분야에서 두각을 보여오다 지금은 나노화학 분야에 주력하고 있다. 2010년에는 산업계가 바라본 ‘IT분야 대학평가’(산학연계 교육인프라 충실성)에서 최우수 등급을 받았을 만큼 연구 인프라는 완비돼 있다. 최근 이화여대는 ‘이화 글로벌 톱5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3년간 연구비 100억원을 투자해 세계적 수준의 선도연구집단을 육성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이다.

최근 김선욱 총장에 이르러, 이화여대는 창립 정신을 돌아보기 시작했다. 이화여대는 여성의 주체성, 직업적 소명의식 등 개화기 이전 미국 선교사들이 일군 이화의 정신을 “이제는 돌려줘야 할 때”라고 말한다.

지난 2006년부터 개발도상국 여성 인재들을 전액 장학생으로 선발해 학부·대학원 과정에서 교육하고 있다. ‘이화글로벌파트너십 프로그램(EGPP)’을 통해 아프가니스탄, 네팔, 모잠비크, 케냐 등 5년 사이 총 27개국에서 117명이 수학했다. 이들은 등록금은 물론 항공료, 기숙사비, 생활보조비까지 지원 받는다.

새학기부터는 아시아-아프리카 등지에서 활동하는 비정부기구 여성 인재를 양성하는 과정, ‘이화글로벌임파워먼트 프로그램(EGEP)’을 개설했다. 인도네시아, 파키스탄 등 아시아 전역에서 10대 1을 넘는 입학경쟁률 기록했다.

여자대학 7곳 남았지만 “해야할 일이 많다”

이화여대는 ‘한국사회 여성 리더의 산실’이라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1977년 한국여성연구소를 발족하면서 여성학 강좌를 대학에 처음 개설했다. ‘여성’을 학문의 영역으로 끌고 들어온 지 30여년이 지났다. 어느 덧 11개 단과대학과 15개 대학원을 갖췄다. ‘연구하는 대학’에서 ‘지식 나눔의 대학’으로 뻗어나가려 실험은 계속되고 있다.

전국 200여개 종합대학 중 여자대학은 7곳만이 명맥을 이어가고 있지만 이화여대는 여성 교육에 한층 더 속도를 내고 있다. 이화여대는 단 한명의 여성이라도 억압받거나 자유를 침해당하지 않을 그날까지 이화의 정신은 변함이 없다고 항변한다. ‘여자가 무슨…’이라는 편견이 살아있는 한.

최성욱 기자 cheetah@kyosu.net

 


여성교육을 이끈 전 총장들

이화의 先見之明 “세계화와 열린교육”

 

메리 F. 스크랜튼(1886~1890)

1886년 뉴잉글랜드 지부로부터 최초의 선교사로 지명받아 한국에 와서 단 한 명의 학생과 함께 이화학당의 문을 열었다. 지식습득과 기독교의 정신을 알게 하는 데 교육목적을 뒀다.

“우리의 목표는 이 여아들이 외국사람들의 생활, 의복, 환경에 맞도록 변하게 하는 데 있지 않다. 우리는 단지 한국인을 보다 나은 한국인으로 만드는 것으로 만족한다. 우리는 한국인이 한국적인 것에 대하여 긍지를 갖게 되기를 희망한다.”

룰루 E. 프라이 (1907~1921)

여성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절감해 1910년 대학과를 신설했다. 1914년 유치원, 1915년 유치원 사범과를 설치해 교수진 강화와 교과과정 정비, 제반규칙 제정 등 학교 행정의 현대적 기틀을 마련했고 ‘메이데이’ 행사를 처음 시작했다.

“수십년간 한국 여성들은 자신을 위한 ‘향상의 여지가 있다는 것’을 모르는 무지 속에서 만족하고 살아 왔으나, 이제는 그들이 남자와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을 때까지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 만약 국가의 운명이 여성에게 달려있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시간과 자본을 투자해 여성에게 고등교육의 기회를 부여해야 한다.”

엘리스 R. 아펜젤러(1922~1939)

1925년 4월 이화학당 대학과를 이화여자전문학교로 발족시킨 초대교장이다. 신촌캠퍼스 이전을 위해 뉴욕에서 모금 운동을 벌이는 등 신촌캠퍼스 완공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39년 명예교장이 됐다.

김활란(1939~1961)

1931년 미국 콜럼비아대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아 한국 최초의 여성박사가 됐다. 이화여대 초대 총장으로 취임한 이래, 역사의 격동기를 함께 했다. 대한민국상, 막사이사이상, 다락방상 등을 수상했다.

“지금 우리들은 과거 선배들이 가졌던 것과 똑같은 헌신적 정신을 가지고 있는가. 침식조차 잊고 학교와 나아가서는 국가를 위하여 싸웠던 것 같은 정성이 있는가. 집에서 안 보내주면 도망을 와서까지 배우려고 애쓰던 학도로서의 기풍을 지니고 있는가. 앞으로의 이화는 지금 우리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큰 규모와 체제로 발전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세계화’라는 목표와 전망이 서야 할 것으로 생각한다.”(1961년 5월 ‘창립 75주년 기념식사’ 중에서)

김옥길(1961~1979)

제8대 김옥길 총장은 이화의 새로운 역할을 이화교육의 세계로의 확대와 여성의 인간화를 위한 공동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 ‘아시아지역 여자기독교대학협의회’ 구성과 학술세미나 개최 등의 활동을 주도했다.

한국 최초로 파키스탄에 선교사를 파견해 이화의 섬김과 나눔의 정신을 실천했다. 재임 기간 동안 ‘열린교육정신’을 바탕으로, 5천명 안팎이었던 학생 규모가 8천명으로 확대됐다. 학교 기반이 안정화 단계에 접어들면서 새로운 성장의 계기를 마련한 총장으로 평가 받는다.

‘실험대학’ 제도는 김옥길 총장의 대표 교육성과다. 이화여대에 새로운 학풍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제도적 정비를 모색하고 학생들의 자율성을 강화하는 계기가 됐다. 더불어 1970년대, 국내 대학 최초로 여성학 강좌를 개설해 한국사회에 여성문제 인식의 틀을 마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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