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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지랑이 같은 내 인생, 『가게로 일기』
아지랑이 같은 내 인생, 『가게로 일기』
  • 염정삼 서평위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 승인 2012.02.20 14: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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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gitamus 나는 생각한다

여기저기서 조금씩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약간은 한숨이기도 했고, 약간은 선망이기도 했다. 일본중세문학을 전공하시는 선생님이 헤이안 시대의 일기문학인 『가게로 일기』에 대한 발표를 하는 자리였다. 모두에게서 한탄과 부러움이 섞여 나왔던 대목은, 주인공 여인이 어느 해 정월 초하룻날 남편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다가, 다른 여인에게 가버린 것을 알고 ‘내 집 앞을 그냥 지나쳐 가시지 않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는 대목에서였다. 한탄은 버림 받은 여인에 대한 안타까움에서였고, 부러움은 많은 여인을 아내로 거느리며 아내들의 집을 자유로 출입할 수 있었던 당시 일본 남편들에 대한 선망에서였다. 말할 것도 없이 한쪽은 여선생님들에게서, 한쪽은 남선생님들에게서 나오는 반응이었다.

그녀는 그해 서른여섯 살이었다. 10세기 일본 헤이안 시대의 귀족 여인, 제 이름을 가지지 못하여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어머니(미찌쓰나의 어머니)로밖에는 불리지 못하는 여인이었다. 열아홉 살에 권문세가의 자제였던 후지와라 가네이에의 아홉 명의 부인 가운데 두 번째 부인이 되었고, 미모와 재능을 겸비한 자존심 강한 여인이었으나 남편에게 버림 받고 혼자 울어야 했던 밤들을 일기로 채워서 세상에 남겼다. 일본 일기 문학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당시 일본 상류 사회의 결혼제도는 물론 일부다처제였다. 남자는 몇 명이라도 아내를 얻을 수 있었으며, 언제든 마음에 드는 아내의 집을 찾아 머물다가 떠나곤 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남편이 3년을 찾지 않으면 자연스럽게 부부관계는 해소된 것으로 여겨지는데, 그것을 일본말로 ‘도코바나레’라고 부른다. 그러면 더 이상 결혼은 유지되지 않는다.

매해 초하룻날이면 찾아오던 남편이, 그녀가 서른여섯이 되던 해의 정월 초하룻날에는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빼앗겨 그리로 가 버렸다. 그래도 남편 가네이에를 기다리며 그녀는 다음과 같이 썼다. “초나흗날도 신시 무렵, 초하룻날보다도 더욱 요란스럽게 행차를 알리며 오는데, ‘오십니다 오십니다’ 라고 아랫것들이 계속 말하는데도, 초하루 같은 일이 또 벌어지면 어쩌나, 민망할 텐데 라고 생각하며 그래도 가슴 졸이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행차가 가까워져 우리 집 하인들이 중문을 활짝 열고 무릎 꿇고 기다리고 있는데도, 아니나 다를까 그대로 또 스쳐 지나갔다. 오늘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상상에 맡기겠다.”

상상해보라. 내 집 앞을 스쳐 지나가는 남편의 발걸음 소리를 들으며 그녀는 어떤 마음이었겠는가. 그 무렵 당당하고 멋진 남편의 풍채에 대비하여 시들어가는 자신의 미모와 젊음을 아쉬워하며 “거울을 보니 내 모습이 밉기만 하다”고 한탄한다. 결국 그녀는 나이 서른아홉에 스무 해에 걸친 부부의 연을 다하고 혼자 쓸쓸히 살다가 60세 무렵 세상을 떠났다.

그녀가 살았던 10세기 후반은 중국에서는 오랜 혼란시기를 접고 막 송나라가 들어선 시기이고, 우리나라에도 고려왕조가 들어선 지 얼마 안 되는 시기다. 우리 땅의 여인들이 자신들의 기록을 우리의 문자로 남기게 되는 것이 15세기 훈민정음이 만들어지고 나서도 한참 후의 일이다. 그에 비하여 일본의 고유문자로 기록된 여성문학이 천여 년을 뛰어넘어 애잔한 여성적 감수성으로 고스란히 다가온다는 점에서 우선 먼저 놀라게 되고, 그것이 섬세한 묘사와 일본 전통시가 양식인 아름다운 와카로 전해진다는 사실이 내게는 무엇보다 부러운 일이었다.

염정삼 서평위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HK교수

그녀가 아니었다면 천 년 전 촘촘한 사회 권력의 그물망 속에서 숨 쉬고 있는 힘없는 여인의 숨결을 우리가 어떻게 만날 수 있겠는가. 그 사랑과 회한의 일상을 기록으로 남기며 그녀는 와카로 노래했다. “나는 뭐란 말인가...” “봄이 왔어도 옷소매 눈물의 얼음 녹질 않고” “이슬이 맺혀 옷자락 차디차니 젖어 새운 밤” “그 누가 긴긴 이 밤 당신 옆에 있을까”라고. 아지랑이나 연꽃위의 이슬처럼 사라져 버릴 사랑이 안타깝고 그 안타까움만큼 고독했던 한 여인이 “한 해가 저물듯 내 인생도 저문다”고 말할 때 천 년의 세월이 내 옆으로 선뜻 다가와 앉는다.

전체 동아시아 역사에서 공인된 기록으로 평가받는 것은 정치적으로나 학술적으로 의미 있는 해석을 부여받는 것들뿐이었다. 『가게로 일기』는 그런 시대에 개인의 느낌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를 알려주는 소중한 기록이다. 그 덕분에 아지랑이 같이 사라졌을 시대상이 더불어 고스란히 전해져, 결혼이나 죽음의 의식은 어떻게 진행되는지 구체적으로 알려준다.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으로서의 자아는 근대의 산물이지만, 사랑과 분노, 회한과 절망 등을 느끼고 표현하는 자아는 어디에도, 어느 시대에도 있었음을 알게 해준다는 점에서 이 책은 기록의 의미를 다시 한 번 되새기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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