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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한국 금석문 연구
나의 한국 금석문 연구
  • 조동원 성균관대 명예교수
  • 승인 2012.02.13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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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로칼럼] 조동원 성균관대 명예교수(사학)

“금석이란 시간이 흐르면 마멸되기 마련이어서 모든 금석문 자료를 한군데로 집대성한 후 1비1첩처럼 하나의 정본을 만드는 작업이 절실하다. 당연히 연구인력 양성도 병행돼야 한다.”

조동원 성균관대 명예교수
역사를 공부하는 연구자들은 언제나 사료에 갈증을 느낀다. 산처럼 쌓인 근현대 기록조차도 특정한 주제로 깊이 파고들다 보면 항상 부족하다. 기록이 성글게 남아 있는 중세나 고대의 경우에는 연구의 고충이 더욱 심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쇠나 돌 등에 새겨진 금석문은 전근대의 문헌 기록을 보완하는 중요한 자료다. 예를 들어 고려시대 이전의 문헌 자료는 신라촌락문서, 사경류, 원효의 論疏 정도에 불과하다. 하지만 한국 고대의 금석문은 작은 글자 하나까지 있는 것을 포함하면 250여종 정도나 된다. 나는 한국 금석문을 수집하고 정리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내가 금석문을 처음 접한 것은 대학에 갓 입학한 1959년이었다. 당시 성균관대는 중앙도서관 완공 기념으로 금석문 탁본전을 개최하기로 했는데, 이를 담당했던 분이 나의 은사이신 임창순 교수님이다. 탁본 대상이었던 고려시대의 묘지명 220종은 경복궁 회랑의 마루 밑에 방치되다시피 놓여 있었다. 우리 1학년들에게 주어진 소임은 묘지명의 먼지를 닦고 먹을 가는 일이었다. 탁본 과정이 눈에 익을 무렵, 탁본을 담당하던 선배들이 수업으로 자리를 비운 틈을 타서 나는 먹물을 찍어 묘지명을 두드릴 수 있었다. 나는 임 교수님의 칭찬과 함께 탁본에 본격적으로 참여하게 됐다.

대학원을 마치고 성균관대 박물관에서 일하면서 나는 조좌호 박물관장께 건의해 전국적인 탁본 작업을 진행하게 됐다. 원광대에 전임으로 부임한 1974년 이후에도 나는 원광대 박길진 총장님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을 수 있었다. 7년 장기계획 아래 전국의 금석문을 권역별로 나눠 조사하면서 탁본을 했다. 그 후 1989년 성균관대로 자리를 옮겼지만 금석문의 조사와 정리 작업은 쉬지 않았다. 여러 선생님들의 격려와 내가 봉직했던 학교들의 지속적인 지원이 큰 도움이 됐음을 두말할 나위도 없다.

물론 나는 금석문 조사 결과를 혼자만 간직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전근대 금석문을 망라한 『한국금석문대계』는 1979년 전라북도편을 시작으로 1998년 강원도편까지 모두 7권으로 간행됐다. 몇 십년간 조사한 1천200여종 가운데 782종을 골라 여기에 수록했다. 조선총독부의 『조선금석총람』을 비롯한 기존의 금석문 자료집은 활자로 옮긴 것들이었다. 기존 자료집이 원탁의 대교가 충실하지 않아서 신뢰성이 떨어지는 데 비하면, 『한국금석문대계』는 탁본한 그대로 전문을 수록했다는 점에 특징이 있다. 전근대 역사 연구의 기초 자료집으로 활용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서예사나 미술사 연구에서도 유용하게 쓰이고 있다.

평생 하나에만 몰두하다보면 크든 작든 보람이 없을 수는 없다. 각지에 흩어진 금석문을 발로 뛰면서 조사했던 나 역시 우리 문화재의 보호와 보존에 미력이나마 기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장흥 보림사의 남북탑지를 다시 찾아내고, 연곡사에 탁본하러 갔다가 연곡사 현각선사비의 비편을 발견해서 학계에 보고한 것은 내가 두고두고 기쁘게 생각하는 일들이다. 오래된 지도를 들고 탁본 도구가 든 배낭을 맨 채 산속을 헤매느라 간첩으로 자주 오인 받거나 열악한 교통편으로 고생했던 일들도 이제는 웃으면서 되돌아보게 된다.

2010년 12월에 나는 개인적으로 수집해온 탁본 자료를 모두 성균관대 박물관에 기증했다. 어찌 보면 내 삶을 기증한 셈이어서 아쉬움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학교에서 보직을 맡지 않았더라면 금석학 연구에 보다 큰 성과를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런 아쉬움과 함께 후련함도 교차했다. 나로서는 50년간 메온 짐을 내려놓았기 때문이다. 후학들에게 널리 활용되기만을 바랄 뿐이다.

이제껏 국내에 있는 금석문은 내가 힘닿는 대로 조사를 마쳤다. 하지만 북한에 있는 금석문이라든지 해외에 산재한 금석문은 아직도 제대로 정리되지 못한 상태다. 뿐만 아니라 금석이란 시간이 흐르면 마멸되기 마련이어서 탁본 시기에 따라 판독 내용이 달라질 수밖에 없다. 모든 금석문 자료를 한군데로 집대성한 후 1비1첩처럼 하나의 정본을 만드는 작업이 절실하다. 당연히 이러한 작업을 감당하는 연구 인력의 양성도 병행돼야 한다. 정부에서 연간 몇 억원의 예산만 추가로 투입해도 가시적인 성과를 낼 수 있는 사업이 바로 금석문 분야다. 우리의 전통 기록을 체계적으로 보존해 후세에 남긴다는 점에서는 그 공공성도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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