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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시대 변화는 ‘찻잔 속 폭풍’ … 1955년 이후가 더 중요”
“일제시대 변화는 ‘찻잔 속 폭풍’ … 1955년 이후가 더 중요”
  • 최익현 기자
  • 승인 2012.02.13 17:0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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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책_ 허수열 지음,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 연구-식민지근대화론의 농업개발론을 비판한다』(한길사, 2011.12)

 

조정래 소설가

“그 끝이 하늘과 맞닿아 있는 넓디나 넓은 들녘은 어느 누구나 기를 쓰고 걸어도 언제나 제자리에서 헛걸음질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만들었다. 그 벌판은 ‘징게 맹갱 외에밋들’이라고 불리는 김제 만경평야로 곧 호남평야의 일부였다. …… 그 초록색 들판은 누구에게나 한없이 넉넉하고 푸짐하면서도 경건하고 겸손한 마음까지 품게했다.” -『아리랑』 제1권에서

이영훈 서울대 교수
“『아리랑』이 시작되는 1904년으로 돌아가면 그 지평선까지는 광활한 갯벌과 소금기로 풀이 죽어 있는 갯논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역사를 아는지 모르는지 조정래는 징게 맹갱 외에밋들의 광활함과 풍요로움을 그토록 구성지게 노래했다.” - 「김제 歷史의 본류에 진입 못하고 이방인으로 맴돈 조정래와 무엇을 알고 모르는지 구별조차 못하는 MBC-조정래와 MBC의 반박에 대한 재반박」(시대정신, 2007. 가을)

허수열 충남대 교수

 

“옥토와 황무지, 수탈과 개발, 이 서로 대립적인 시각이 수탈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이라는 두 이론을 매개로 일제 초 김제·만경평야지대에서 첨예하게 맞부딪친 것이다. 수탈론과 식민지근대화론이 격렬하게 맞부딪힌 이런 경우는 일제 초 조선의 농업을 이해하는 데 더없이 좋은 연구 소재가 된다. …… 동진수리조합에서 농지개량사업을 실시하면서 작성한 지도에서 보더라도 벽골제 아래의 평야는 갯벌이나 갯논이 아니라 정상적인 농경지였음이 명백하다.”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 연구』 중에서

‘벽골제’가 식민지근대화론의 뜨거운 ‘최전선’으로 떠올랐다. 2007년 벌어졌던 식민지근대화론을 둘러싼 논쟁이 재연된다면, 이 중심에는 ‘벽골제’가 놓이게 될 것이다. 허수열 충남대 교수(경제학)는 지난해 말 상재한 『일제초기 조선의 농업 연구』(한길사, 2011.12, 사진)에서 고대 삼국시대 축조된 벽골제는 ‘방조제‘가 아니라 ‘저수지‘임을 거듭 확인하면서 그의 동학이자 식민지근대화론의 중추인 이영훈 서울대 교수(경제사)를 향해 논쟁의 화살을 날렸다.

사실 허 교수는 이미 6년 전 『개발 없는 개발』(은행나무, 2005.3)을 통해 식민지근대화론의 데이터 오류를 비판했던 바 있다(이 책 역시 2011년 11월 논리적 약점으로 지적된 ‘토지생산성을 고려한 일본인 소유의 논면적 추계’ 부분을 수정, 보충해서 개정증보판으로 새롭게 나왔다). 그의 이번 저작은 조선시대 문헌에서부터 최근 공개된 식민지하 기밀문서까지 폭넓게 검토한 위에서 집필된 것이라, ‘실증‘의 무게가 전작에 비해 훨씬 견고하다.

벽골제가 ‘방조제’냐, ‘저수지’냐 이 사실이 왜 중요한 것일까.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은 벽골제 항목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전라북도 김제시 부량면 월승리에 있는 저수지 둑. 백제 11대 비류왕 27년(330)에 쌓은 것으로, 고려 17대 인종과 조선 3대 태종 때 수축(修築)하였으며, 지금은 둑의 일부와 비석이 논 가운데 드문드문 남아 있다. 사적 정식 명칭은 ‘김제 벽골제 비 및 제방’이다. 사적 제111호.”

앞의 인용문처럼, 작가 조정래는 이 김제·만경평야를 ‘한없이 넉넉하고 푸짐한’ ‘초록색 들판’으로 묘사했다. 그 풍요로운 대지를 식민주의자들이 모두 수탈해갔다는 지적이다. 벽골제 주변은 그런 풍요의 공간이었다는 인식이다.

식민지근대화론 비판의 중심에 놓인 벽골제

반면 이영훈 서울대 교수는 이 벽골제를 ‘방조제’로 간단히 규정하고 만다. 바닷물이 무시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지은 둑이었다는 그의 인식 저편에는 낮은 수준의 조선 농업 생산성이 전제돼 있다. 벽골제 앞까지는 볼 것 없는 갯논이었다는 것, 소설가의 환각과 달리 그곳은 소금기로 숨죽어 있는 불모의 땅이었다는 것, 이러한 판정이야말로 식민지근대화론이 강조하는 일제에 의한 개발론의 정당성을 가장 쉽게 증명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이 교수는 2007년 <시대정신> 여름호와 가을호에 ‘조정래’에 관한 비판과 반론을 집필, 벽골제의 불모성을 강조하면서 김제·만경평야의 당대적 생산성이 비약적으로 증가하는 것은 1910년대 후반 일본인들에 의한 관개개선 사업 이후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허수열 교수의 분석은 다르다. 조선시대 역사사료와 1910년대 동진강수리조합 관개사업 자료 등을 면밀히 검토한 뒤, 이렇게 주장한다.

“동진수리조합에서 농지개량 사업을 실시하면서 작성한 지도에서 보더라도 벽골제 아래의 평야는 갯벌이나 갯논이 아니라 정상적인 농경지였음이 명맥히 드러난다. 벽골제는 처음 축조됐을 때뿐만 아니라 1415년 중수 당시 및 일제 초에도 방조제로서 기능한 적은 결코 없었던 것이 과거 및 현존하는 모든 증거에서 명백하다.”

이런 벽골제를 이영훈 교수가 방조제로 단정함으로써 “일제 초 전라북도의 수리시설에 대한 그의 서술이 거의 대부분 부정확하고 자의적인 해석으로 가득 차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허 교수의 결론은 간단하다. “일제 초 김제·만경평야는 조정래가 생각했던 것처럼 풍요로운 평야지대는 아니었다. 그러나 해안에서 6~7km 떨어진 벽골제 앞까지 갯벌이었다고 본 이영훈의 주장은 전혀 타당성이 없다”라고 ‘수탈론’과 ‘개발론’의 두 시각 모두를 비판한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이 하나 발견된다. 벽골제 주변이 갯논, 소금기로 죽은 불모의 땅이 아니라면? 식민지근대화론의 기초적 근거가 되는 기본 방정식은 두 가지다. 하나는 토지생산성, 즉 두락당 생산량이 19세기말에 참담한 수준으로 떨어졌다는 것, 다른 하나는 이렇게 떨어진 생산성은 1911~18년 급속히 성장한다는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의 가장 대표적인 실증적 연구로 평가되는 『한국의 경제성장 1910~1945』의 추계 결과가 그것이다.

그런데 허수열 교수는 벽골제를 불러내 김제·만경평야지대가 일제에 의해 정비되기 이전에도 어느 정도 수준의 생산성을 유지했다는 사실을 강조함으로써, 1911년 이전 통계에 잡힌 조선의 생산성이 저평가돼 있을 가능성을 제시했다.

“『한국의 경제성장』에서 농업생산이 빠르게 증가했다고 추계했던 1911~17년은 공교롭게도 조선총독부 자신이 통계가 부정확했다며 두 번에 걸쳐 스스로 수정했던 바로 그 기간에 해당한다”라고 비판하는 허 교수는 1911~18년간의 ‘일직선적인 성장’을 가리켜 “정말 이 기간에 조선경제가 이토록 빨리 성장할 특별한 이유라도 있었을까?”라고 의문을 던진다. 바로 이 점에서 ‘벽골제‘는 하나의 환유가 된다.

납득되지 않는 1911~1918년의 일직선적 성장

이영훈 교수는 1910년대, 즉 일제에 의한 합리적 농업개혁이 진행되면서 농업 생산성이 증가한다는 자신의 입론을 강화하기 위해 ‘벽골제’ 주변을 불모의 땅으로 설명했던 것이다. 하지만 허 교수의 결론은 그렇지 않다.

“김제·만경 평야에는 농업용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긴 했지만 정상적인 농업이 이뤄졌다.” 이 ‘정상적인 농업’이야말로 “식민지근대화론의 주장이 조선 재래의 수리시설은 과소평가하고 일본인에 의한 개발은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점을 명백히” 보여주는 실증적 성과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이는 나아가 “식민지근대화론의 농업관이 조선왕조시대 말기 농업의 부조를 지나치게 확대해석하고 일제시대의 농업개발을 지나치게 확대해석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식민사관과 사실상 다를 바 없는 주장을 하고 있다”는 그의 뼈있는 비판전략을 완성시킨다. 

저자 허 교수가 내린 결론은 간단하다. “일제시대의 변화는 20세기 전체의 변화양상에서 보았을 때 마치 찻잔 속의 폭풍과 같은 것이었고, 농업혁명이라도 할 수 있을 정도의 놀라운 생산의 증가는 195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후반 사이의 20여 년간에 이뤄졌던 것이다.” 식민지근대화론의 논리적 취약점을 건드리는 동시에 그는 하나의 새로운 논쟁을 예고한 셈이다. 20세기 한국사회의 가장 큰 변화가 1950년대 후반 조봉암의 급진적 농지개혁에서 비롯한다는 진단이다.

최익현 기자 bukhak64@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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