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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자료와 씨름한 10년 성과 … “불후의 명작 쓰려면 30년도 짧아”
1차 자료와 씨름한 10년 성과 … “불후의 명작 쓰려면 30년도 짧아”
  • 최성욱 기자
  • 승인 2012.02.13 15: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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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_ 일흔에 ‘인재저술상’ 수상한 신복룡 건국대 석좌교수

지난 연말, 정치학계에 작은 돌풍이 일었다. 한국정치학회(회장 김호섭)가 선정하는 ‘인재저술상’이 일흔의 한 노장학자에게 돌아갔기 때문이다. 수상작 한국정치사상사(상·하)』(지식산업사, 2011)는 정치학계에서 단독저자가 집필한 최초의 통사로, 학계의 이목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1차 자료(원전)를 바탕으로 한 노력이 빛을 발했다는 평가다.

한국정치학회가 2009년부터 수여하는 인재저술상은 정치학계 최고 권위의 저술상 중 하나다. 매년 단 한 작품만이 영예를 누릴 수 있다. 2009년 시상 첫해에는 심지연 경남대 교수의 『최창익 연구』가, 2010년에는 이종은 국민대 교수의 『정치와 윤리』가 수상했다.

지난 9일, 2011년 수상자인 신복룡 건국대 석좌교수(71세, 정치외교학과·사진)를 만나러 갔다. 정년퇴임 5년차에 저술상이란 어떤 의미일까. 『한국정치사상사』 저술배경이 더욱 궁금해졌다.

 Ⓒ 최성욱 기자

“역사는 기록으로 남겨지죠. 특히 사상사는 기본적으로 그 사람(연구대상자)의 저술에 입각해서 써내야 하는데, 저술이 없는 사상은 사상이 아닐까요? 문자역사 이전에도 사상은 분명히 존재했는데 말이죠. 기층문화는 저술이 없습니다. 그들은 산과 강을 바라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신 교수가 걸어온 학문의 길이 그랬지만 이 책이 통괄하는 사상사도 민초들의 ‘산 역사’다. 원시공동체의 민회나 향약, 풍수지리설 등은 신 교수가 공을 들인 단락들이다. 왕조 중심의 서술도 ‘반대’다. 대신 묘청, 신돈, 정여립 같은 실패한 개혁자들을 재조명했다. 정치승려 신돈은 정도전의 말처럼 요승이고 황음무도한 사람이었을까. 조선왕조의 지배윤리와 역성혁명을 서술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양이라는 게 신 교수의 인식이다.

‘성공한 인물’ 90명, 역사적 공과 비틀기의 힘은 原典

학자들에 의해 ‘성공한 인물’들은 역추적했다. 단군에서 박정희에 이르기까지 90여명의 사상적 공과에 ‘비틀어 보기’를 택했다. 비틀기의 힘은 원전에서 나왔다. 이처럼 방대한 사상사를 이끌어가는 그의 연구방법론은 정치학에 새로운 가능성을 시사한다. ‘정치학자들은 왜 1차 자료(원전)를 택하지 않는가.’

예컨대 다산 정약용은 기존의 제도와 폐단을 개혁하려한 실학사상의 선구자적 인물로 알려져 있다. 신 교수가 원전에서 발견한 모순은 묵형을 설파(“평민은 팔뚝에 평민이라고 먹물로 새겨야 한다”)했던 정약용과 조선 실학자들의 ‘현실논리’다.

“실학자들은 백성과 칸막이를 허물 추호의 뜻도 없었어요. ‘칸막이를 갖고 살자, 다만 우리는 너희(백성)에게 베풀 것이고 연민을 가질 것’이라는 게 당대 실학자들의 수준이었습니다. 한국사상사, 철학사, 종교사는 이 점을 간과하고 있죠.”

신 교수는 단지 새로움을 추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짚을 건 짚어야 한다’는 게 정치학의 지향점이라는 확신이다.

요즘 신 교수는 그리스와 로마 영웅 50명의 생애를 그린 전기문학 『플루타르크 영웅전』 번역에 몰두하고 있다. 원전의 글씨가 작아 따로 확대한 인쇄물이 책상 이곳저곳에 널브러져 있었다. 학교 연구실에서는 그리스사를 보고, 집에서는 로마사를 번역한다. 신 교수는 완역까지 앞으로 2년을 내다보고 있다. “젊었을 때 꿈이었어요. 『삼국지』와 『플루타르크 영웅전』을 동시에 번역한 최초의 번역가가 되고 싶다는… 좀 황당하죠?”

Ⓒ 최성욱 기자
『플루타르크 영웅전』 번역작업은 『한국정치사상사』를 출간한 직후에 착수했다. 저술과 번역은 은퇴한 교수가 학자의 길을 이어가는 작업 중 하나다. 그런 의미에서 신 교수의 미래는 그 어느 때보다 창창하다. 『한국정치사상사』가 정년 전후로 통틀어 10년에 걸친 역작인데다 『플루타르크 영웅전』과 『삼국지』로 이어지는 연구계획이 든든히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두 번역작업에 엄청난 시간과 공력을 쏟아야 하지만 원고지 1만1천 장에 달하는 『한국정치사상사』 가 없었다면 엄두도 못 냈을 일이다.

퇴임 후 대표저작으로 한 학기 한 과목 강의

신 교수는 밥 먹으면 5분 안에 학교 가야하고 해지기 전엔 집에 들어가지 않는 것으로 알고 70년을 살았다. 그도 그럴 것이 건국대 정치학과에 입학한 때가 1961년. 이 대학에서 석·박사까지 거쳤으니 건국대 문턱을 드나든 지 52년째다. 그런 신 교수의 인생 후반기를 수놓고 있는 건 다름 아닌 저술이다. 신 교수의 말마따나 퇴임학자에게 저술은 ‘생의 이유’인지도 모른다. 지금도 자신의 대표저작 『한국정치사상사』와 『한국분단사연구』로 매 학기 한 과목씩 학부 전공과목을 가르친다.

학부생까지 아울러 신 교수는 후학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단다.

“일찍 결심해야 합니다. ‘불후의 명작’을 쓰려면 30년의 세월이 길지 않아요. 정년까지 시간을 역산해 보면 적어도 30대 후반에는 시작해야 합니다. 그래야 한 권을 쓸 수 있죠. 左顧右眄하지 말고 시대의 유혹을 떨쳐내길 바랍니다. 돋보기 쓰기 시작하면 너무 늦거든요.”

신 교수는 『플루타르크 영웅전』 번역작업이 끝나는 대로 『삼국지』 번역을 시작할 계획이다. 팔순을 향해 달려가는 지금, ‘학부생 신복룡’의 꿈이 무르익어가고 있다.

글·사진  최성욱 기자 cheetah@kyosu.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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