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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연재]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②
[기획연재] 김용준 교수의 내가 본 함석헌②
  • 교수신문
  • 승인 2002.07.0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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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後에 찾은 고향, 뜻밖의 재회 기다려
1950년 10월 상순 어느날 나는 동두천을 지나 소요산을 우로 멀리 바라보면서 전곡을 향해 달리는 미군 짚차 위에서 ‘당신은 지금 38도선을 넘고 있다’라는 영문의 표지판을 읽으면서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당시 미군 25사단 24열대 3대대 부관전속 통역이었다.

“6·25 전쟁은 38선 때문인데 38선이란 무언가? 대체 그것을 만든 것은 누구인가? 루우즈벨트와 스탈린인가? 아니다. 그러면 우연이게. 38선이 생기는 데는 역사적 필연이 있다.”라고 함석헌은 그의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38도선의 역사적 필연성을 역설한다.

38선은 미국 민주주의와 소련 공산주의의 금새를 매겨 놓은 금이기 때문에 현대문명의 낙제線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38선은 세계역사의 금이다. 그러나 동시에 38선은 하나님이 이 민족을 시험하려고 낸 시험문제다. 아마 마지막 문제일는지 모른다. 이번에 급제하면 사는 것이고 이번까지 낙제면 아마 영원히 망하고 말 것이다. 세계가 하나가 되고 문명이 우주시대에 뛰어들게 되는 때에 종살이를 하는 민족이 있어서는 아니되겠으므로 삼손같이 고난의 맷돌을 굴리던 한국이 갑자기 해방되었다. 우리만 아니라 지금 모든 매었던 민족이 해방을 받는다. 진시황이 죽고 3천궁녀가 해방이 되듯, 로마 제국이 망하고 콜로세움에 갇혔던 맹수들이 놓여나듯, 인격의 자유를 빼앗기고 비웃음거리가 되었던 모든 씨·이 갑자기 홍수처럼 놓여나와 워싱턴·뉴욕·모스크바·제네바를 뒤쓸기 시작하고 있지 않나? 그러나 아무리 역사의 特赦日일지라도 근본 도덕의 원리를 무시하지는 않는다. 스스로 함이 생명의 법칙인 이상 그것을 잊어버려서는 안 된다. 그러므로 그것을 보자고 내세운 문제가 38선이다. 본래 우리의 잘못은 자유와 통일을 모른 데 있다. 자기를 깊이 파지 않은 데 있다. 그러므로 해방을 시켜 역사의 연합운동 날에 참여는 시키되, 그저 주지 않고 나라 복판에 금을 긋고 이것을 넘어 보라고 한 것이다. 그만큼 학대를 받고 천대를 받았으면 자유의 귀한 줄을 알았어야 할 것이다. 자유가 귀한 줄을 안다면 통일한 나라 아니고는 안 되는 줄을 분명히 깨달았어야 할 것이다. 남이 모르는 고난의 철학을 얻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을 보자는 것이, 한 마디로 국민의 성격을 다듬었나 보자는 것이 38선이다. 천 오백년은 그만두고 일제 36년에 그 고난의 풀무 속에서, 그 수련의 물결 밑에서 역사적 모든 찌기, 때, 모든 허물, 섞여 든 것이 다 빠지고 씻겨지고 오직 하나만이 남았어야 할 것이다. 오직 하나 새 나라, 한 나라의 믿음만이.

“38선은 하나님이 낸 시험문제”

38선에 대한 이만한 해석과 의미 부여를 나는 다른데서 찾아보지를 못했다. 그렇기 때문에 어느 모로 보나 38선은 민족의 가슴을 쪼갠 금이요 不條理의 금이다.

“도리를 무시하는 민족은 부조리의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것이 바로 6·25다.”

바로 하나님의 시험문제로서의 38선을 유엔군의 일원인 미군 부대의 짚차를 타고 나는 넘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6·25 사변을 몸소 경험한 대한민국 아니 전 조선사람 어느 누구도 각자가 겪은 우여곡절을 기록한다면 그 누구라서 소설책 한 권이 엮어지지 않겠는가. 내가 소속하고 있었던 미군 25사단 24연대 3대대는 흑인부대였고 나의 상관인 대대부관도 흑인 대위였다. 그 이름은 나다나엘 맥크위였다. 지금 생각해도 지나치리 만큼 서둘러 북상한 미군은 이제는 내일 모래면 압록강 어름깨고 세수할 수 있겠다는 지점에서 한국 전선에 투입된 중공군의 반격에 여지없이 허물어지고 만다.

소위 1·4후퇴로 이어지는 서부전선 붕괴의 한 가운데 서게 되는 부대였다.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되는 평양북도 개천읍에서 벌어졌던 초토작전과 몇백 미터의 거리를 두고 백병전에 가까운 총격전이 벌어졌었던 칠곡의 야간전투를 생각할 때마다 나는 지금도 전율을 느낀다. 어떻든 일주일 만에 후퇴를 거듭하여 평양북도 개천읍에서 개성 밑 장단까지 이르렀던 어느날 밤 나는 맥크위 대위와 나눈 대화를 잊지 못한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후퇴한다면 앞으로 일주일이면 부산에 도착하지 않겠느냐, 그러면 한반도는 전체가 적화되고 말 것이고, 이제 남은 일은 나부터라도 정식으로 국군에 입대하여 싸워나갈 수 밖에 다른 도리가 없지 않느냐”라는 나의 절규에 가까운 질문에 맥크위 대위는, “두 주먹 밖에 없었던 우리 흑인들이 오늘날 이 정도의 자유와 인권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처절한 투쟁의 결과였다. 설사 전국토의 적화통일이 이루어진다 하더라도 굴하지 말고 싸우면 반드시 승리는 올 것”이라며 나를 격려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고맙다는 인사와 더불어 나도 빨리 정식 전투원이 되기 위해 이 부대를 떠나야겠다고 말했더니 맥크위 대위는 그 싸움은 전투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당신은 군인이 되기보다는 학문의 길로 가는 것이 좋겠다는 뜻밖의 충고를 하는 것이 아닌가?

여기서 나는 이 이야기를 상세히 기록할 마음은 없다. 다만 내가 겪었던 6·25 사변에서 잊지 못할 한토막의 아름다운 추억을 더듬어 보았을 뿐이다. 후에 미국에 갔을 때 나는 워싱톤의 펜타콘에 연락해 맥크위 대위를 수소문했지만 지금껏 재회의 기회를 이루지 못했음을 부언해 둔다.

우여곡절 끝에 나는 부산 서대신동 판자집 교실에서 지금 생각해보아도 말이 안되는 몇주일간의 강의를 듣고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화학공학과 6회 졸업생이 된다. 맥크위 대위 말대로 그 피난 와중에서도 나는 무급조교로 학교에 남겠다는 생각을 했고 과의 교수님들과도 어느 정도 합의를 보고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여의치 않았다. 피난살이 판자집 대학에 부산 사람이 아닌 내가 그래도 학교에 무급조교로 남겠다는 결심도 그리 쉬운 것은 아니었다. 이 이야기도 이쯤으로 접어두자. 후에 안 이야기지만 국대안반대 신입생 투쟁위원이었다는 전력을 당시 학교당국의 고위층이 문제삼아 무급조료로 학교에 남는 일이 성사 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고소를 금치 못했던 기억이 남아있다.

나는 고향으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1951년 겨울이었다. 우두커니 놀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내 고향인 천안에는 당시에 천안공업고등학교가 있었다. 천안농업고등학교는 역사가 길지만 공업고등학교는 신설된 학교였다. 여하튼 나는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졸업생이 아닌가. 그러니 나의 관심은 공업고등학교에 쏠리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서울이 재수복되었다고는 하지만 모든 학교는 아직 제대로 문을 열지 못하고 있었고 서울에 있는 중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학생들은 타교생이라는 이름으로 자기 고향의 중고등학교에 등록해 교육을 받고 있을 때였다. 시장에 나가면 책을 근으로 달아서 팔고 있었다. 그때 근으로 사들인 책들 중에 지금껏 소중하게 나의 책장에 간직돼 있는 책들이 몇권 남아 있다. 한마디로 혼돈 그 자체였다.

전쟁 중에 농고 교사가 된 공대 졸업생

그러나 교육은 이 와중에서도 멈출 수 없는 중대사였다. 소문에 의하면 각 중고등학교에서는 교사부족으로 말이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갓 대학 졸업장을 받은 풋내기 젊은이는 무턱대고 천안공업고등학교 교장실을 찾아갔다. 그리 크지 않은 천안읍에서 아무개 병원집 큰아들이라는 허명도 없지 않았다. 처음 만난 교장선생님께 내 소개를 한 다음에 학교에 나와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교장 선생님은 후에 기별해 주겠다고 했다. 귀가해서 오랫동안 기별이 있기를 기다렸지만 허사였다. 종무소식이었다. 풋내기 젊은이는 실의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대학에서 발을 못 붙이고, 문제될 것 없이 당연히 되리라고 생각했던 공업고등학교 교사자리도 결국은 퇴짜를 맞은 셈이었다.

하릴없이 시장에서 이 책 저 책이나 뒤지면서 근으로 책이나 사 모으고 있던 어느날 난데없이 천안농업고등학교 교감선생님이 만나자고 기별을 전했다. 공과대학 졸업생이니 농업고등학교는 관심 밖이었지만, 여하튼 농업고등학교 교무실로 교감선생님을 찾아갔다. 이중국 선생님이었다.

말이 필요가 없었다. 수인사를 마친 후 교감선생님은 내일부터 나와서 가르치라는 것이다. 뒤 칠판을 가리키며 이미 시간표도 짜놓았다는 것이다. 어안이 벙벙했다.

여하튼 이렇게 나는 천안농업고등학교 교사가 됐다. 그리고 이 학교 현관 옆 수위실에 마련된 좁은 화학실험 준비실에서 까맣게 잊고 있었던 함석헌 선생님을 직접 뵙게 되는 내 일생에 가장 중요한 사건이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꿈엔들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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